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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 아키짱의 사랑, 한보배의 처연한 연기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싸인

'싸인' 아키짱의 사랑, 한보배의 처연한 연기

빛무리~ 2011. 1. 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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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배는 1994년생으로 올해 18세가 된 소녀 배우입니다. 2002년에 영화 '복수는 나의 것'으로 데뷔했군요. 요즘 아역배우들은 모두 연기를 너무 잘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쉽지 않은 일인데, 한보배는 제 머릿속에 매우 독특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2006년에 김상경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조용한 세상'에서였습니다.


사진작가 류정호(김상경)는 타인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초감각적 능력을 지녔으나, 그 때문에 학창시절 엄청난 불행을 겪게 된 후, 줄곧 세상에 마음을 닫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연처럼 11세의 소녀 수연(한보배)을 위탁 보호하게 되면서, 그녀의 맑은 심성에 감화되어 차츰 다시 마음을 열게 되지요.

나중에 어린 소녀들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범에게 수연이 납치되어 위험에 처하자, 류정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숭고한 희생으로 그녀를 구해냅니다. 한보배가 연기하는 수연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목석 같던 김상경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떠오를 때마다 저도 함께 미소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으로는 3부작 드라마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주인공 이미륵의 첫사랑 '무던이' 역할로 출연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압록강은 흐른다'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학창시절에 너무나 매혹적으로 읽었던 소설이라,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작의 독특한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고 망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작품이 탄생했더군요.

무던이는 소작농의 딸로서 지주의 아들을 흠모하는 처지라, 꽤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해야 했지요. 소년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수줍은 소녀의 모습이며, 자기 마음도 몰라주고 무심하게 책만 들여다보는 도령을 향한 원망스런 눈빛이며, 신분계급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모습이며... 전체적으로 쉽지 않은 내면 연기가 필요했는데, 한보배는 썩 훌륭히 소화해냈습니다. 그녀의 가녀린 외모와 목소리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분위기가 드라마에 너무나 잘 어우러져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런 한보배가 드라마 '싸인'에 특별출연을 했습니다. 역시 맑으면서도 어딘가 처연해 보이는 한보배의 이미지에 꼭 맞는 캐릭터 '아키짱'이군요. 비록 짧은 출연 분량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상당했습니다. 무려 67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추억되는 아키짱의 사랑은 그대로 한 편의 슬픈 동화같았습니다.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백골 사체가 일본에서 발견되고, 새로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된 법의관 윤지훈(박신양)과 고다경(김아중)은 그 백골 사체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노력합니다. 십대 후반의 소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골 사체의 신분은 결국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결핵을 앓고 있던 그녀가 죽음 직전까지 홀로 사랑하며 기다리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오노미치에 있는 조선인 고등학교의 교장을 지낸 사람으로, 현재는 80대 중반의 백발 노인이 되었지만 67년 전에는 그 학교의 학생이었습니다.


1944년,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기 전날 밤, 소년의 창문으로 웬 큼직한 돌멩이가 날아들었습니다. 놀라서 뛰쳐나가보니 빨리 뛰지도 못하고 절뚝거리며 도망가다가 넘어지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곁으로 다가온 소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울먹이며 "꼭 살아서 돌아와" 라는 말 한 마디만 남기고, 소녀는 그렇게 멀어져갔지요. 그녀가 남긴 돌멩이에는 짧은 시가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을 한국어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의 모자가 점점 멀어져 나비가 될 때까지 그를 바라보네...

저 짧은 문장에서 느껴지는 애절한 그리움... 하지만 67년의 세월이 흐른 후, 소녀의 사랑을 받던 그 소년은 아키짱이라고 불리던 이름과 어렴풋한 얼굴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름조차 본명인지 아닌지도 모를 만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아키짱은 전쟁터에 나간 그를 기다리다가 죽은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녀가 죽은 장소는 히로시마의 바닷가였는데, 먼 곳으로 어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고깃배나, 전쟁터에서 귀환병들을 싣고 돌아오는 군함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그 장소를 가리켜 '돌아오는 길'이라 불렀다지요.


아키짱이 결핵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윤지훈으로부터 들은 노인은, 그제서야 그녀가 같은 학급의 여학생이었음을 기억해냅니다. 동급생들은 폐병을 앓고 있던 그녀에게 마구 돌을 던졌습니다. 병을 옮길지 모른다는 이유로 학교에 나오지 말라며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돌팔매질을 당하던 소녀를 보호해 준 것이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단호한 태도로 동급생들을 꾸짖어 돌팔매질을 멈추게 한 뒤, 눈물 흘리는 소녀에게 다가와 흰 손수건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끝내 소녀의 얼굴 한 번을 똑바로 보지 않던, 무뚝뚝한 소년이었습니다.

그 한 번의 사건으로 아키짱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전쟁터에 나간 그를 기다리다가 바닷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 후 소년은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왔지만, 머리에 온통 서리가 앉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67년이라는 세월을 건너서야 누군가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고 기다렸음을 알게 되었지요.


"미안해요. 나를 이렇게 기다려 준 사람인데 이름도,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군요."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그녀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끝내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사라질 뻔했던 아키짱의 사랑이, 윤지훈과 고다경의 노력에 힘입어 결국은 그 상대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비록 드라마 전체의 줄거리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짧은 에피소드였으나, 슬픔의 카타르시스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더불어 오랜만에 한보배 특유의 처연한 연기를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저는 그 짧은 싯귀가 끊임없이 뇌리를 맴도는군요. 그의 모자가 점점 멀어져 나비가 될 때까지 그를 바라보네... 그의 모자가 점점 멀어져 나비가 될 때까지 그를 바라보네... 문득 누군가를 향해 그토록 애틋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아픔이면서 차라리 벅찬 기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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