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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는 외박중' 강무결(장근석)의 편지 - 엄마에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매리는 외박중

'매리는 외박중' 강무결(장근석)의 편지 - 엄마에게

빛무리~ 2010. 11. 1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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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괜찮아, 소영씨... 다 괜찮아. 나는 언제나 여기서 소영씨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울고 싶을 땐 추운 곳에서 혼자 헤매지 말고 나를 찾아 와... 내 어깨에 기대서 울어. 그렇게 속시원히 다 울고 나면 달콤한 아이스크림도 사 줄게. 소영씨는 안심해도 돼. 죽는 날까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남자, 이 세상에 적어도 한 명은 있으니까 말야.


매일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내 엄마...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으로 넘치는 소영씨... 그런데 세상 남자들은 너무 의리가 없지? 여태껏 아무도 소영씨의 그 사랑에 보답한 남자가 없었어. 열 일곱 살 소녀였던 엄마의 뱃속에 나를 남겨 둔 채 무정하게 떠나 버린 내 아버지도 그랬고... 그 이후에 사랑한 남자들도 모두 그랬지. 하지만 괜찮아, 나는 끝까지 소영씨한테 의리를 지킬 거야.


내가 1년 전에 사랑했던 준이는 소영씨를 많이 닮았어. 그 애도 엄마처럼 늘씬하고 도도하지만 은근히 사랑에 목 매는 스타일이거든. 그 애의 눈빛을 보면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어. 그래서 더 빨리 헤어지자고 했지. 어차피 나는 준이한테 의리를 지킬 남자가 아닌데, 그 애의 넘치는 사랑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남자한테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내 뺨을 후려치던 그 매운 손길 만큼 매섭게, 깨끗이 나를 잊길 바랬어. 한동안 힘들겠지만, 그 애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면서 지내다 보면 잘 견딜 수 있을 거라 믿었어. 아니, 믿고 싶었어.


나는 소영씨를 지켜야 하니까... 언제든 또 사랑에 상처받고 오들오들 떨면서 내게 달려오면, 그 때마다 안아도 주고 어깨도 빌려줘야 하니까... 평생 두 여자한테 의리를 지키는 건 자신 없어. 나는 쉽게 여자를 만나고 쉽게 헤어지지만,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적은 없었지. 준이한테 살짝 흔들릴 뻔 했지만, 잘 벗어났어.

그런데 묘한 녀석이 나타났어. 이름도 특이하게 매리 크리스마스라는 녀석인데, 엄마도 봤지? 객관적으로는 무척 귀엽지만 주관적으로는 내 스타일 아닌, 그 조그만 여자아이 말야. 그 녀석 의외로 나랑 통하는 구석이 많더라고. 만약 남자였다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여자라서 아쉬워. 여자랑은 좀 친해지다 보면 꼭 이상한 감정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방해를 하거든. 아무튼 그 녀석이 말했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의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난 속으로 깜짝 놀랐어. 내 생각도 녀석과 똑같았거든.


세상에는 의리 없는 남자도 많지만, 의리 없는 여자도 많지. 남자보다는 좀 적을지도 모르지만... 내 친구들 보면 진심으로 사랑하다가 일방적으로 여자한테 버림받는 녀석도 무지 많더라고. 그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지만, 우리처럼 가진 것 없는 놈들이 버림받는 이유야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어? ... 그런데 매리는 좀 다른 것도 같아.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와 결혼하기 싫다면서 나 같은 놈한테 방패막이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면 말야.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질색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그 쪼끄만 게 하루종일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면서 졸라대다가 넘어져서 발목까지 다치고... 그런 꼬락서니를 보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 그냥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고 해서 승낙했는데, 이렇게 귀찮아질 줄은 몰랐지. 자기 아빠 한 명도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무슨 민폐를 안 끼치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는지... 하여튼 허술한 녀석이야.


하지만 더 걱정되는 건, 그 애가 나를 좋아할까봐였어. 녀석은 내 스타일도 아닌데다가 너무 순진해서, 나 같은 놈을 좋아하다가는 크게 상처받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 애가 말하더군. 무결이 너는 객관적으로 되게 멋있지만 주관적으로 남자 같지는 않다고 말야. 다행이었지. 어쩌면 그렇게도 내 생각과 똑같은지... 역시 매리 크리스마스는 나와 잘 통하는 면이 있어.

이사를 도와준답시고 짐 몇 개 옮겨 주더니, 매일 저녁마다 내 집에 와서 다섯 시간씩을 보내겠다네. 그건 안 되지. 아무리 내 스타일 아니라고 해도 계속 붙어있다 보면 위험해지거든. 벌써부터 조금씩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그냥 어린애처럼만 보이던 녀석이 얌전히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로 보였던 거야. 게다가 내 장갑을 떠 주겠다며 자기 손바닥을 내 손바닥에 붙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이즈를 재는데 기분이 묘해 지더란 말이지.


그러고 보니 낮에도 좀 이상했어. 그 녀석 아버지가 하도 끈질기게 미행을 하셔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도망치는데, 내 허리를 잡고 뒤에 앉아서 매리가 말하더군. 노래방에서 발라드를 부르는 내 모습이 멋있었다고 말야. 그런데 나도 모르게 씨익 웃으면서 물었어. "그래서... 좋아졌어?" 그 녀석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말했지. 나도 알고 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그렇게 물어보던 내 마음 속엔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아.

녀석과 함께 있는 데 익숙해져 버린 걸까? 다시 돌아온 준이를 내가 받아주지 않자, 친구들은 내게 물었지. 매리 때문이냐고, 그 애와 정들어 버린 거냐고... 그런데 나는 선뜻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어. 왠지 당황스럽고 난처해서 그 자리를 피했던 거야. 어느 사이엔가 추운 방 안에 그 애가 보이지 않으면 왠지 허전해서 그 녀석이 반쯤 뜨다가 두고 간 털실 장갑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만 하루가 지나도록 전화 한 통 없으면 괜시리 서운해지기도 하고... 엄마 생각에도 이건 아주 이상한 거 맞지?


소영씨, 난 그 애가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차갑게 말해야 할까? 길 잃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빛으로 졸라대면 또 약해지지 않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보내는 편이 낫겠지? 이제 곧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매리 그 녀석도 평생 자기에게만 의리를 지켜 줄 남자를 만나 자기 이름처럼 즐거워야겠지? 내가 아무리 완전 무결이라도 평생 두 여자한테 의리를 지키는 건 벅차니까 말야.


오늘도 잠시 내 어깨에 기대어 쉬다가, 말도 없이 또 사랑 찾아 날아가버린 소영씨... 나는 찬바람 부는 벤치에 앉아서 엄마에게 주려던 아이스크림을 혼자 먹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 소영씨는 이미 나에게 가장 큰 의리를 지켰어. 열 일곱 살 나이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또 다시 찾아 올 운명적 사랑을 꿈꾸는 엄마의 삶에 족쇄가 될 줄을 알면서도, 소영씨는 나를 선택했으니까... 덕분에 나는 이 세상과 만나 눈부신 햇빛도 보고, 아름다운 노래도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번 삶은 이렇게 한평생 살다 가는 것도 괜찮아.


다음 번 삶에는 소영씨와 나, 엄마와 아들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만나 볼까? 그럼 우리... 꼭 첫사랑으로 만나자. 이번 삶의 첫사랑이었던 내 아버지는 의리를 저버리고 떠났지만,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테니까... 이번 삶에서는 한없이 사랑을 찾아 추운 세상을 헤매고 다녔지만, 다음 번 삶에서는 평생 내 품에서 따뜻하게 쉬도록 해 줄 테니까... 소영씨, 우리 꼭 첫사랑으로 다시 만나자. 어때, 엄마도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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