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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Plan.B' 윤형사(윤진서)의 독백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도망자 Plan.B

'도망자 Plan.B' 윤형사(윤진서)의 독백

빛무리~ 2010. 11. 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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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능한 형사다. 이름(小蘭)에 걸맞게 작은 난초처럼 아름답고 청초하지만 결코 그렇게 연약하지는 않다. 나는 못된 놈들을 때려잡고 싶어서 형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아주 잘 해 왔다. 무술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남자 동료들에게 짐이 될만한 수준은 넘어섰고, 무엇보다 머리가 좋아서 외국어 실력과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모두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 내색은 안하지만, 사실은 어디서나 내가 없으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 매는 거다, 귀여운 것들.

남들은 내가 도수(이정진)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 평소 여자들에게 매너 좋고 친절한 그의 태도 때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다. 나에게만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부서의 여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그의 뜻을 오해할 리 없지 않은가? 다만 핑계거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아무리 험한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나도 여자인데, 무턱대고 먼저 좋아한다며 달라붙어서야 너무 체면이 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의 조그만 호의를 빌미삼아 "당신이 먼저 나를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뻔뻔하게 우기면서 나는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어이없어하는 그 표정마저도 나는 좋았다.


도수는 천생(天生) 형사다. 그가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으려 하는 이유는, 다만 그것이 자기의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권력에 빌붙는 국장이나, 뒷구멍으로 돈을 집어넣어서 팀장 자리를 차지한 백남정(데니안) 따위와는 태생 자체가 다른 사람이란 말이다. 지위가 높으면 무얼 하고, 가진 것이 많으면 무얼 하나? 그들은 남자로 태어나 자존심 하나 지키지 못하는 허섭쓰레기 인생들이다. 하지만 도수는 권력이나 돈 앞에서 한 번도 비굴해 본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그 골통같은 남자를 내가 사랑하는 진짜 이유다.

도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원칙과 집념 뿐이다. 세상살이의 요령이라고는 조금도 부릴 줄을 모른다. 도수가 여기저기 부딪히고 깨지면서 범인도 잡아 오고 장물도 되찾아 오면, 국장과 팀장은 경찰서에 편안히 앉은 채 그가 수확해 온 열매의 달콤한 물만을 쪽쪽 빨아먹고 껍데기는 버린다. 물론 도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 공을 빼앗기건 말건, 억울하게 징계를 받건 말건 그저 자기 할 일을 오늘도 계속할 뿐이다. 멋.있.다.


나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그가 좋았다. 나도 사람인데 왜 편안히 앉아서 밥을 얻어먹고 싶지 않았을까? 한 번이라도 출동을 덜 하고 어떻게든 내근만 하면서 월급을 받으려 하는 선후배 동료들이 널렸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도수처럼 멋진 남자가 있는데 그 앞에서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무도 내 등을 떠밀지 않았지만 나는 도수가 출동할 때마다 제일 먼저 따라 나섰고,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절대 겁먹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도수 앞에서 나도 그만큼 멋진 여자이고 싶었던 거다.

목석같던 그 남자도 조금씩 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목을 지키고 있던 내가 도망치는 범인을 막지 못하고 놓쳤는데, 급하게 그 뒤를 쫓다 말고 도수는 멈춰서서 나에게 "괜찮아?" 라고 물었던 거다. "다치지 마라!" 그 말 한 마디를 남겨놓고 다시 바람처럼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나의 사랑은 완성되었다. 그는 이미 내 것이었다. 잠시 기절한 것뿐인데 내가 죽는 줄 알고 애타는 눈빛으로 진땀을 뻘뻘 흘리며 인공호흡을 하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 생에 그처럼 행복한 시간이 다시 올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어리석다. 언제나 그에게는 형사로서의 임무가 최우선이며, 그게 당연한 것이다. 내가 처음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도수는 달라진 것이 없건만, 아니 오히려 그는 예전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대해 주건만 이상하게도 나는 서럽다. 그를 사랑했던 이유가, 이젠 내 서러움의 이유가 되고 말았으니, 내가 달라진 것이다.

혼잡한 육탄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도수에게로 떨어지는 몽둥이를 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조건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주저없이 달려가 그의 등 뒤를 가로막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허리에 느껴졌고 나는 쓰러졌다. 상대는 일어서는 나를 향해 다시 몽둥이를 휘둘렀고, 나는 이마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도수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돌아보며 "괜찮아?"라고 물었을 때,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가 무사하니까,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런데 나를 업고 가다가 지우(비, 정지훈)와 마주치자, 도수는 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권총을 뽑아 들었다. 순간 서러움이 북받치며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그를 보호하려다가 혼자서는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다쳤는데, 지우와 마주치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나의 존재는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여자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고, 그저 귀찮은 짐짝일 뿐이었다. 삽시간에 나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도 서러웠다. 나에게 그는 전부이건만,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병실에 누워 차분히 생각했다. 그는 일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남자로 변할 수 있을까? 또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지금까지처럼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가 계속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골통 형사로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나를 자상하게 아껴주는 남자이기를 바라고 있다. 어쩌면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는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문병을 와 준 그에게 나는 심통을 부리면서, 이제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저 골통은 못 알아들은 건지, 알아듣고도 모른 체 하는 건지 그저 묵묵히 내 손에 밥숟갈만 쥐어 줄 뿐이다. 설움이 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걱정을 하는 진심이 조금은 느껴져서 울컥하는데, 그 순간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눈빛을 번뜩이면서 휭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역시... 또 금세 나를 잊어버린 거다.

나는 그를 포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그는 너무 멋있다. 그럼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하지만 수시로 잊혀지면서 그의 곁에 있는 것은 너무 외롭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사랑은 처음부터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하게 되었던 것을, 이제 내 의지로 그만둘 수 있을까? 사실은 자신없다. 외로움을 견디면서라도 끝까지 그의 곁에 남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래도 조금은 더 심통을 부려야겠다. 그렇게 홀대를 당하고도 너무 빨리 헤벌쭉 웃어 버리면, 이거야 너무 자존심이 상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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