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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모든 것을 바꿔 놓은 장사부의 죽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도망자 Plan.B

'도망자' 모든 것을 바꿔 놓은 장사부의 죽음

빛무리~ 2010. 10. 2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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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가벼움과 산만함에 좀처럼 몰입이 쉽지 않았던 드라마 '도망자'가 이제서야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특히 주인공 지우(비, 정지훈)의 캐릭터가 적절한 무게감을 찾은 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친구 케빈(오지호)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비실비실 웃고만 있던 그가, 이제야 비로소 허파에 바람 든 인형이 아니라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임을 여실히 증명했거든요.

다른 면에서의 가벼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여주인공 진이(이나영)를 대하는 태도의 경박함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툭하면 허락도 없이 입을 갖다대는가 하면, 위험한 장소에 끌어들여서 미끼로 사용하고 혼자 달아나더니만 그녀가 실컷 얻어맞고 굴욕을 당한 후에야 나타나서 구해주는 등... 남주인공 지우는 아무리 예쁘게 볼래야 볼 수 없는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9~10회에 나타난 지우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법이니 그 경박한 껍질 속에 진중한 내면을 숨기고 있었다는 식으로 갖다 붙이면 되기야 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캐릭터에 일관성이 없더군요. 그래도 매력없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보다야, 이제라도 매력있는 쪽으로 바꾸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지우의 캐릭터가 갑자기 확 살아나게 된 데에는 주변 인물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우선 최고의 매력남으로 비춰지고 있던 카이(다니엘 헤니)의 정체가 드러났지요. 그는 진이를 사랑하면서도 자기 사업을 위해 이용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진이가 믿고 사랑하던 그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더 이상 그녀를 속일 수 없다며 양두희 회장(송재호)에게 반발하기는 했으나, 너무 늦은 뉘우침이었습니다. 결국 카이 때문에 진이는 죽음의 문턱까지 끌려가게 되지요. 이렇게 라이벌의 존재가 배신남으로 낙인찍히게 되자, 상대적으로 그녀 곁을 지키는 남주인공 지우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칠맛나는 조연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조연들 중에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미친 존재감' 나카무라 황(성동일)이겠지요. 그러나 10회에는 그보다 훨씬 더 커다란 존재감으로 드라마 전체를 압도한 조연이 있었으니, 바로 장사부(공형진)였습니다.


중국에 본거지를 둔 장사부는 지우의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미약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였습니다. 원래는 탐정 지우의 의뢰인이었는데 사업이 기울면서 그의 정보원으로 격하되고 말았지요. 언제나 사채업자들에 쫓기는 신세에다가, 돈 많은 과부 하나 잡아서 팔자 고쳐볼까 했더니 하필 그 여자도 적들이 고용한 스파이였습니다. 나카무라 황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사업 계획을 짜는 와중에 케빈의 유서를 쥐도새도 모르게 강탈당할 만큼, 그렇게 어리숙하고 눈치없는 인물입니다. 이쪽에서 이용당하고 저쪽에서 이용당하고... 탐정의 정보원으로는 빵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돈도 없고 능력이 없으면 의리라도 있든가, 이 못난 인물은 무엇 하나 가진 게 없습니다. 양회장의 심복인 황미진(윤손하)에게 포섭당해 지우를 배신하기까지 했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대단한 욕심을 부렸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편안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돈과 평화로운 일상을 원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빈털터리 동네북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에 가장 약자이며, 소박한 일반인에 가까운 캐릭터였습니다.


'도망자 Plan.B'에서는 이제껏 그렇게 총을 쏘아대고 거친 액션을 선사하면서도 사람의 숨이 끊어지는 모양은 보여주지 않았었지요. 이 드라마에 비장미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게 장난처럼 가볍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10회에서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군요. 그것도 정신없는 총격전 중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꼼짝 못하게 잡아 묶어 놓고, 죽음 직전의 공포를 최대한 느끼게 하면서 천천히 온 몸에 독을 퍼뜨리는,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당했습니다. 끔찍한 죽음의 주인공은 바로 장사부였습니다.

황미진이 장사부를 생포해 온 이유는 오직 지우의 입에서 진실을 끌어내는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우와 진이가 보는 앞에서 황미진의 수하는 방울뱀의 독이 들어 있는 주사바늘을 장사부의 몸에 갖다 대었고, 그는 오줌이라도 쌀 듯 발버둥치며 살려달라 애원했습니다. 원래도 자존심은 없는 캐릭터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지요.


최후를 맞이하는 공형진의 연기는 순도 100%의 명품이었습니다. 핏발 선 눈동자, 경련하는 두 뺨, 진땀과 눈물이 섞여 흘러내리는 액체들, 흰 거품을 물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입... "너는 나를 개처럼 부려먹기만 했잖아. 나는 너 때문에 죽는 거야. 네가 나를 죽이는 거야." 끝까지 못나게 지우를 원망하며, 장사부는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너무 못난 사람의 죽음이라서 더 슬펐습니다. 잘난 사람들에게 끝까지 이용만 당하다가 죽어가는 그 모습이 짜증날 정도로 슬펐습니다.

그런데 장사부의 죽음은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감정없는 냉혈인간 같던 지우가 사실은 누구보다 뜨거운 의리로 동료를 아끼는 진국이었음을 보여주었거든요. 그 동안 둘의 사이를 봐서는 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장사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지우는 미친듯이 절규하며 숨겨 두었던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그것도 소용없이 장사부가 눈앞에서 자기를 원망하며 죽어갈 때, 지우의 뺨에 흐르던 것은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리는 피눈물이었습니다.


장사부에 이어 지우와 진이도 독살당할 위험에 처했는데, 그들을 구해 준 것은 언제나 원수처럼 쫓아다니던 도수(이정진)와 윤형사(윤진서)였습니다. "화살표가 완성되면 나를 찾아 와" 지우가 유치장 벽에 남겨 두었던 단서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데 사용되었던 셈입니다. 형사들이 황미진의 주의를 흐트러뜨린 틈을 타 도주에 성공한 지우는 장사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며 슬픔에 잠깁니다. "나 때문에 죽었어." 그리고는 급박한 와중에도 챙겨 왔던 장사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들고 사찰에 찾아가 분향하며, 그를 위해 정성껏 제사를 지내 달라고 스님에게 부탁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지우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진이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따뜻하게 부릅니다. "지우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납니다. 사랑하던 카이의 배신을 알고 충격받은 나머지, 앞으로는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도 의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이건만, 장사부의 죽음 앞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지우의 모습을 보니 삽시간에 누그러지고 마는군요. 이제껏 동행하면서도 지우를 믿지 못하던 진이가 이제는 그를 신뢰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의 관계는 이로써 급진전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장사부의 죽음은 이렇게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주인공의 이미지를 가벼움에서 진중함으로 바꾸었고, 남녀 주인공의 사이를 갑자기 친밀하게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공형진의 명품 연기를 통해 드라마 자체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별다른 활약이 없던 조연의 최후로서는 가히 최상의 임팩트였다고 하겠습니다. 막판에 공형진은 성동일보다 더한 미친 존재감을 뽐내고 퇴장했군요. 그저 평온한 일상을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파란만장하게 죽어간 비운의 사나이 장사부의 명복을 빌며, 또 작은 역할이지만 최선을 다했던 배우 공형진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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