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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윤두수와 초옥, 이기적인 현대인의 자화상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구미호 여우누이뎐

'구미호' 윤두수와 초옥, 이기적인 현대인의 자화상

빛무리~ 2010. 7. 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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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여우누이뎐' 2회는 숨가쁘게 달렸던 1회에 비해 약간 평이한 전개를 보였지만,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연이와 초옥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정규 도령이 등장했군요. 고을 현감의 자제인 조정규는 수려한 외모로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 의외로 순진하고 허당스런 면이 있어서 무척 귀여웠습니다.

윤두수(장현성)의 금지옥엽인 초옥(서신애)의 끊임없는 연서는 귀찮아 하면서도, 반딧불이를 잡으러 나갔다가 마주친 천민 소녀 연이(김유정)의 자태에 한 눈에 반해버린 정규는, 그녀 앞에서 한껏 폼을 잡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디며 개울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모양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녀 연이의 따뜻하고 순수한 반응은 정규 도령의 뻘쭘함을 단숨에 녹여 버렸습니다. 연이는 개울물에 엉덩이를 담그고 주저앉은 채, 일어나려고 해도 자꾸만 미끄러지며 일어서지 못하는 정규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줍니다. "잡으세요" 그런데 조정규는 그 낭패스런 상황에서도 사대부의 체면을 차리며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머뭇거리는군요.

이에 연이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일에도 남녀를 구별해야 합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조정규는 연이의 당돌함을 탓하지 않고 "그래, 네 말이 옳다" 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서서 시원스런 미소를 짓는군요. 아직 어린 도령이지만 조정규의 인품이 소탈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더불어 그 장면은 애틋한 첫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듯 연이와 정규의 로맨스는 마치 유년시절의 동화처럼 아름다웠지만,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이 소년과 소녀처럼 따뜻하거나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뭔가 다른 속셈을 가지고 구미호 모녀를 바라보는데, 그 마음 기반에 깔려있는 것은 차갑기 그지없는 이기심입니다. 벙어리 머슴 천우를 제외하고, 지금 구미호와 연이에게 진심어린 호의를 베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감 윤두수가 구미호 모녀를 잘 대접하는 것은 앞으로 자기 딸 초옥을 살리기 위해 희생시켜야 할 사람들이기에 그 죄책감과 동정심으로 일시적인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윤충일과 윤초옥은 아버지의 귀염을 받는 연이를 질투하며 사사건건 괴롭힙니다. 특히 초옥은 어린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섬뜩한 간악함을 드러내며 연이를 깊은 우물에 처박기까지 합니다. "네가 발버둥치며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내가 지켜보아 주겠어"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솔직히 저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초옥의 그런 모습도 별로 낯설지 않게 느껴집니다. 의외로 어린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지독한 잔인함을 드러낼 때가 많아요. 아직 선악을 뚜렷이 구별하지 못하는 백지상태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한동안 유행했던 '왕따' 라든가 '이지메' 라는 단어들도 어른들의 사회가 아니라 아이들의 사회에서 먼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사회에도 물론 따돌림은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지요. 왜냐하면 어른들은 '미워하고 따돌리는 게 나쁜 짓'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닌 척을 하거든요.

하지만 아직 그런 가면을 쓸 줄 모르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따돌림이란 더없이 노골적이고 지독히 파괴적입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까지 모두 아무런 여과 없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날아갑니다. 연이를 대하는 초옥의 태도는 그런 어린아이의 원초적 잔인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더불어 윤초옥의 캐릭터는 무조건 사랑을 독차지하려 하고, 자기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기면 견디지 못하는 현대 어린이의 이기심을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형제가 많고 가난했던 시절의 아이들은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것이 당연했고, 부모의 사랑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 또한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으나, 물질이 풍요로운 데 비해 형제가 단출하거나 외동으로 자라나는 현대의 아이들은 무엇이든 독점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요.

초옥에게는 배다른 오빠가 둘이나 있지만 아버지 윤두수의 사랑은 정실 소생의 외동딸 초옥에게만 쏠려 있었고, 윤초옥은 이기적인 아이의 전형으로 자라났습니다. 이제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연이와 나눠야 한다고 오해하게 되었으니, 고집세고 안하무인인 초옥의 성격에 그 정도의 포악을 부린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윤두수의 캐릭터는 겉과 속이 다른 현대인의 이기적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구미호와 연이를 보호해 주고 있지만, 속으로는 연이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언제나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짓고, 속으로는 살의에 가까운 증오를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매끄러운 현대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인군자처럼 보이는 윤두수는 사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을 이용하거나 해칠 수 있는 인물이며, 심지어는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여 때를 기다리는 치밀함까지 겸비했습니다. 비록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나 대단한 수준이 아니며, 그 부드러운 미소 한켠에는 인간애가 아니라 구미호의 아찔한 미모에 반한 탐욕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현대인이라 해서 처음부터 모두 윤두수와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투명한 인품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했었지요. 하지만 사회 자체가 워낙 어둡게 병들어 있기 때문에 그 순수함을 유지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탁한 물 속에서 홀로 투명한 자는 숨쉬기조차 힘들거든요.

그러다 보니 처음과 달리, 본의 아니게, 살기 위해서 점점 그 탁함에 물들어져 갑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솔직함과 단순함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점점 겉과 속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일종의 '적응'이라 하겠으나, 그래서 결국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윤두수와 같은 인간형으로 변해 버리니 과연 이것을 '발전'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기심의 결정체인 현대인을 윤두수와 윤초옥은 양쪽에서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른의 은근한 악의는 은근해서 소름끼치고, 어린아이의 노골적인 악의는 노골적이어서 끔찍합니다. 이렇게 차가운 마음들 틈바구니에서 한없이 약한 구미호 모녀가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처럼 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꼬리가 아홉개나 달리고 천년이나 묵은 여우라 해도, 인간들 앞에서는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짐승이거든요. 그래도 제발 죽지 말고 살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 마음의 각박함을 조금이나마 적시고 달랠 수 있게, 저는 구미호와 연이가 끝까지 살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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