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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의 '하녀', 그 안에 숨어있는 함정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전도연의 '하녀', 그 안에 숨어있는 함정

빛무리~ 2010. 5. 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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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보고 싶던 영화 '하녀'를 개봉관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생각보다 상당히 괜찮은 느낌을 주는 영화였습니다. 얼핏 뻔한 이야기, 지루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매혹적인 화면의 구성과 원숙한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했다고 하겠습니다. (이하의 내용에는 다량의 스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에서 만만치 않은 함정을 발견했습니다. 충격적으로 표현된 그 주제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자칫 사고의 흐름이 왜곡된 방향으로 비틀어질 수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주인공인 은이(전도연)의 시각에서 영화를 바라보게 됩니다. 현대판 '하녀'인 은이는 주인집 식구들과의 관계에서 철저한 '약자'이며 '못 가진 자'로 표현됩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그녀의 편을 들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집의 젊은 주인 고훈(이정재)이 힘없는 은이를 강제로 범한 것이라면, 저 역시 충분히 은이의 입장에 공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남자가 찾아올 것'을 예감하고 나체 상태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은이의 입장에서 완전히 마음이 떠났습니다.


은이의 캐릭터가 약삭빠르지 못하고 좀 멍청하게 표현되기는 했습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의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젊은 안주인 해라(서우)는 쌍둥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새로 고용한 은이에게도 격의 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은이는 그런 해라의 면전이나 다를 바 없는 가까운 곳에서, 그녀의 남편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끌어안았습니다. 그 남자가 자발적으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은이가 암암리에 추파를 던졌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어린 해라는 남편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녀의 몸으로 쌍둥이를 자연분만하는 것은 무리라고 의사가 말했는데도 개의치 않고, 어떻게든 자연분만을 하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체계적으로 운동을 하는 그녀였습니다. 남편의 아이를 다섯명까지 낳고 싶다는 이유에서였지요.


은이와의 관계를 알기 전까지, 남편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애정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집 안에서, 자기의 남편과 '하녀'가 자기의 눈을 속이고 금단의 열매를 즐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물론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나빴습니다. 하지만 그 분노만은 정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은이'의 시각에서 형상화된 이 영화는, 그녀의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얼버무린 채, 그녀를 괴롭히는 해라와 그 어머니를 희대의 악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만들기는 굉장히 쉬웠습니다. 왜나하면, 은이는 '못 가진 자'이고 해라는 '가진 자'이니까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동정심을 '못 가진 자'에게로 살짝 이끌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커다란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은이가 '못 가진 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피해자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나중에 당한 일은 너무 심하고 부당했습니다. 은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해라의 어머니(박지영)는 그녀를 2층에서 밀어 떨어뜨렸으며, 해라는 은이가 먹는 한약을 바꿔치기하여 강제로 피를 쏟고 유산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녀들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백번 천번 잘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이가 원래 저질렀던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의 중심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고훈(이정재)이 있었지만, 그 남자의 문제는 일단 거론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중점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두 여자, 은이와 해라의 문제니까요.

임신한 여자는 예민해지게 마련이고, 더구나 자연분만이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을 정도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에게 시집을 왔지만, 현재의 그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조금만 참으라고, 나중에 너의 자식들이 훈이처럼 살게 될 것이며, 너는 훈이의 어머니처럼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게 될 거라고 그녀를 달랩니다. 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일 뿐입니다. 지금의 해라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자기 눈앞에서 자기를 기만한 하녀 때문에 끔찍한 분노에 이성을 잃은 어린 여자일 뿐입니다.


은이가 처음부터 '돈을 목적으로' 훈이를 유혹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영화는 표현합니다. 그녀는 단지 젊은 바깥주인의 출중한 외모와 부드러운 매너와 멋진 피아노 실력에 반했을 뿐입니다. 멍청이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계산도 없이, 죄의식도 없이, 그저 멋진 남자에게 끌리는 자기의 본능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저 본능적인 모성에 이끌려 그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인집 마님들의 악행으로 2층에서 떨어져 가벼운 뇌진탕에 걸리고, 독한 약을 먹어서 피를 펑펑 쏟고, 결국은 강제로 수술대 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딴에는 억울하다면 억울하기도 하겠군요.

하지만 저는 끝까지 은이의 입장에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주인집 식구들에게 복수하겠다며 천정에 달린 샹들리에에 목을 매달고 온 몸을 분신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을 뿐, 해라가 그렇게까지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처절하게 타들어가며 죽음을 맞이한 은이의 모습이 너무 충격적으로 뇌리에 남았기 때문에, 마치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못 가진 자'라는 이유로 은이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이 영화가, 저는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하긴, 현실적으로 '가진 자'에 비해 '못 가진 자'는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시선이 너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경계합니다. '못 가진 자'라고 해서 무조건 면죄부를 받는 것도 옳지 않고, '가진 자'라고 해서 무조건 가해자로 몰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영화의 엔딩에서 훈이와 해라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린 딸 나미의 생일을 축하하며 파티를 즐기고 있습니다. 은이의 끔찍한 죽음은 그들의 삶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죽었거나 말거나, 가진 자들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이 가진 것을 최대한으로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일 축하한다, 내 보석같은 딸아~" 라고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서우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이던가요?


제 눈에는 은이보다 오히려 해라가 처연했고, 그녀가 주인공처럼 보였습니다. 앞으로도 해라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잘난 남자'의 허울좋은 껍데기에 매달려 살아가야 하겠지요. 이렇게 저는 '하녀'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는 영원한 화두라 하겠으나, 그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다른 독(毒)을 품어버린, 위험한 영화 '하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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