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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 홍길동과의 만남이 가령(채수빈)에게 큰 행운인 이유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역적:백성을 훔친 도적

'역적' 홍길동과의 만남이 가령(채수빈)에게 큰 행운인 이유

빛무리~ 2017. 3. 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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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범상한 느낌은 아니었다. 처음 만난 덩치 큰 사내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고, 뭔가 신경에 거슬린다 싶으면 거침없이 뺨까지 올려붙이는 조선시대 여자아이라니! 신분 높은 공주나 양가댁 규수도 아니고, 기생도 천대받던 시절인데 하물며 기생의 몸종에 불과했으니. 가령(채수빈)은 천한 중에도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어떠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에서 볼 때 가령의 존재는 벌레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 누구든 마음껏 짓밟을 수 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그만큼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았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한 신분의 가령이가 어찌 그토록 당돌한 성품으로 자라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어려서부터 천대받고 짓밟히며 성장했다면, 티없이 밝고 당돌한 성품을 지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강인하고 긍정적인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남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는데 익숙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령에게서는 그런 품성을 찾아볼 수 없으니, 억세게 운이 좋아 별다른 구박을 받지 않고 자라난 것 같다. 월화매(황석정)와 공화(이하늬, 훗날의 장녹수)가 어린 가령을 거두어 친동생처럼 여기며 살뜰히 대해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언니가 기생이라고 만만한 거냐? 이게 언니를 뭘로 보고!" 홍길동(윤균상)이 공화에게 거침없이 대쉬했을 때, 정작 공화는 아무 말 없었지만 대신 흥분해서 펄펄 뛰던 가령이었다. 하지만 길동은 가령에게 관심이 없었다. 얻어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콩만한 계집애가 손은 더럽게 맵다"고 투덜거렸을 뿐, 그의 관심은 온통 공화에게 쏠려 있었다. 원숙하고 농염하면서도 공허한 눈빛을 지닌 여인, 하지만 감히 임금을 자신의 남자로 만들겠다며 호언장담하는 야심찬 여인, 길동은 그런 공화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공화 역시 길동에게 끌리고 있었다. 비록 왕으로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왕의 기상을 지닌, 그 범상치 않은 남자에게. 

하지만 운명의 회오리 속에 그들의 짧은 사랑은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공화는 접어두었던 야심의 날개를 다시 펼치며 임금(연산군, 김지석)을 만나러 궁에 입성한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며 돌아온 길동의 눈앞에 남은 것은 텅 빈 폐허 뿐이었는데, 스산한 바람이 불어가는 그의 귓가에 쨍쨍하고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떠났어. 나 혼자 남았어. 나는 너 기다렸어!" 손맛이 더럽게 매운, 콩만한 계집애, 가령이었다. 헛헛한 마음으로 다시 길을 떠나는 길동의 뒤를 가령은 종종걸음으로 쫓아오고, 그저 귀찮을 뿐인 길동은 그녀를 쫓아버리려 하는데. 


"죄 짓고 도망치는 중이지? 나랑 함께 있으면 아무도 의심 안 할 거야. 내가 여동생이라고 해. 앞으로는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반말도 안 할게!" 하면서 "오라버니~" 라고 부르는 가령의 모습이 순간 길동의 눈에 친동생 어리니(정수인)처럼 보인다.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남겼던 마지막 혈육...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게 하고 싶었던 애틋한 여동생... 그런 어리니를 풍랑 속에 끝내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일은 홍길동의 가슴에 피맺힌 한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오라버니!" 라고 부르는 가령의 얼굴에 어리니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길동은 차마 그녀를 뿌리치지 못하고 자신의 본거지로 데려온다. 

그런데 지독한 고문 끝에 폐인이 되어버린 부친 아모개(김상중)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가령의 모습을 보며, 차츰 길동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가엾은 제 부모를 살뜰히 보살펴주는 여인에게 끌리는 남자의 마음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게다가 사랑했던 공화는 그를 배신하고 떠난 후가 아니던가!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길동은 나름의 방식대로 가령에게 마음을 표현한다. "밥하고 빨래하고 술 시중들고, 왜 네가 그런 걸 해?" 툭 던지듯 묻는 길동에게 가령이 대답한다. "그거야, 여기 여자가 나밖에 없으니까."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일인데, 길동은 당연하지 않다고 말했다. "여자면 뭐? 왜 여자라고 그런 일을 다 해야 돼? 하지 마!" 


공화의 애인이었던 길동에게 왜 반해 버렸는지, 모두 떠나버린 집에서 왜 혼자 남아 그를 기다렸는지, 가령의 첫 마음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와 함께 지내면서 점점 더 빠져들어 가는 이유는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남자의 시중을 들고, 그 모든 허드렛일은 당연히 여자의 의무라 여겨졌던 조선시대에, 저런 말을 할 줄 아는 남자라니 참으로 새롭지 않은가! 남들과는 생각의 뿌리 자체가 다른 이 남자를 가령은 더욱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홍길동은 시대의 풍운아... 울부짖음 한 번으로 산천초목을 뒤흔드는 힘을 지녔으나 신분의 족쇄에 묶여 있는 호랑이... 이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앞날에 어찌 평온한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가령은 길동 때문에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될 것이다. 최후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모르나, 설령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해도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결코 평탄치 않을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길동과의 만남은 가령의 삶에 있어 가장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에 따르면 가령은 "길동의 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다 여겼던 것 이상을 하게 되고, 하고 싶어 했던 것 이상을 욕망하며,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만끽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화의 보호 속에서 평탄하게 살아왔지만,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진정한 삶과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했던 그녀가, 길동을 만남으로써 눈을 뜨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길동 이 우직한 남자의 한 번 품은 마음은 영원히 믿어도 좋을 것이다. 공화처럼 스스로 떠나지 않는 한, 자신에게 의리를 지키는 여자를 먼저 배신할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이 추워서 잠들기가 어렵다는 가령의 말을 귀담아 듣고, 커다란 돌멩이를 화롯불에 따끈히 데워서는 천으로 둘둘 감싸서 그녀의 침상에 몰래 넣어주는 길동의 모습은, 툴툴대는 겉모습과 달리 뜨겁고 진중한 그 속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았던 기억은, 설령 오랫동안 헤어져 만날 수 없다 해도 가령의 마음을 평생 지탱해 줄 힘이 될 것이니, 어찌 그와의 만남을 일생일대의 행운이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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