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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 4회, 망모(亡母)께 드리는 이영 세자의 편지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구르미 그린 달빛

'구르미 그린 달빛' 4회, 망모(亡母)께 드리는 이영 세자의 편지

빛무리~ 2016. 9. 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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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십니다. 언제나 정겨운 비님이 오십니다. 어머니... 오늘도 이렇게 저를 찾아와 주시는군요. 마지막 인사도 없이 그토록 황망하게 떠나가신 후, 저는 비가 올 때마다 어머니를 뵙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어머니와 더불어 맨발로 젖은 풀잎을 밟으며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몸을 맡기던 그 날, 저는 딱딱한 체면과 함께 두려움도 훌훌 벗어 던졌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저를 가르치셨지요. 허울좋은 말이 아니라 거침없이 몸을 던지는 실천으로, 과감한 용기와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머님과 저는 한 나라의 중전이고 세자인데 나막신도 우산도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찌 빗속에 뛰어들 수 있느냐고 제가 물었을 때 어머님은 반문하셨습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합니까? 중전은, 세자는 왜 늘 그리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맨발로 비 좀 맞으면 국법에 어긋난다고 누가 그래요?" 어머님은 쏟아지는 빗속에 선 채, 망설이고 있는 저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멈칫거리던 제가 신발과 버선을 벗어던지고 빗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곳에서 저를 기다리시던 어머님의 손길 때문이었습니다. 

서늘한 빗물에 온 몸이 젖어들 때, 비로소 저는 깨달았지요. 참으로 많은 것에 얽매여 있었고 무척 많은 것을 두려워했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얽매일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음을 말입니다. 어머님께서 떠나가신 후, 그 원인이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된 저는 극도로 분노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부딪혀 보면 되는 거지요. 지레 겁먹고 움츠릴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겟습니까? 다만 저는 나이가 어렸기에, 충분히 날개가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방탕한 한량의 흉내를 내며 수시로 저잣거리를 돌아다닌 것은, 저들의 경계를 늦춤과 동시에 민심을 살피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중궁궐의 높은 담 안에 얌전히 앉아 사서삼경만 읽는다 하여 좋은 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때로는 허름한 백성들과 부딪히며 비단 옷소매에 얼룩이 묻기도 하고, 때로는 미처 피하지 못한 짐승들의 변을 밟아 신을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약삭빠른 자의 속임수에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 모든 것이 제게는 유쾌한 신천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중 우연히 옆에 서 있던 붉은 쓰개치마의 여인에게서 이상한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지금도 비가 오시는 날이면 제가 항상 그러는 것처럼, 그 여인도 손을 뻗어 빗물을 어루만집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빗속으로 뛰쳐 나가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금방 그칠 것 같으니 조금만 참으시지요. 맞을 땐 즐거워도 고뿔이 꽤 오래 가더이다." 낯선 여인에게 느닷없이 말을 건넨 이유는 어머니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연회석에서 저는 다시 그 여인을 보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분명 그 여인은 김헌의 손자인 김윤성의 약혼녀라 했는데, 양가의 규수가 어찌 기생의 옷을 입고 그 자리에서 춤을 추겠습니까? 하지만 춤추는 그 여인의 손끝이 제 쪽을 향했을 때, 저는 빗속에서 저를 향해 손을 뻗으시던 어머니를 다시 뵙는 것 같았습니다.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뵙고 싶었는데, 그 간절한 마음을 알고 어머님이 오신 게 아닐까... 저는 잠시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독무를 맡은 기생 애심이가 갑자기 사라져서, 제가 공들여 준비한 연회는 망쳐질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연회는 성공리에 마무리될 수 있었고, 그 이후의 계획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청나라 사신 앞에서 영의정 김헌의 콧대를 사정없이 꺾어 주었으니, 이로써 저의 대리청정은 성공적인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도대체 갑자기 나타난 그 여인은 누구이기에, 저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준 것일까요? 혹시 그녀는 어머니가 저에게 보내주신 사람이 아닌가요? 지금 제 마음은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설렘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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