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육룡이 나르샤' 종영, 남은 것은 '뿌리깊은 나무'의 여운 뿐 본문

드라마를 보다

'육룡이 나르샤' 종영, 남은 것은 '뿌리깊은 나무'의 여운 뿐

빛무리~ 2016. 3. 23. 12:38
반응형


어쩌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주인공으로 한 '육룡이 나르샤'는 처음부터 내가 몰입하기 힘든 작품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사극이기 때문에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지만, 높은 시청률과 대중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작품 전체에 담긴 근본적 메시지는 훌륭했지만, 주인공 이방원의 캐릭터는 지독히 잔인하고 냉정하며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러니 심약한 나로서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에 호흡을 맞추며 몰입하기가 버거웠다.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혹자들은 이방원의 캐릭터를 두고 '겉으로만 잔인할 뿐 속마음은 여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방원이 흘린 모든 눈물은 악어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금'의 장금(이영애)은 참된 인술을 펼치는 의원이었고,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한석규)은 백성을 위해 온갖 역경을 뚫고 한글을 창제한 성군이었다. 그들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서동요'의 무왕(조현재)과 '선덕여왕'의 덕만(이요원)은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얄궂은 운명 때문에 천민 신분으로 자라났고, 나중에는 폭정을 일삼는 위정자들을 제압한 후 왕위에 오른다. 한 때 핍박받는 백성이었던 그들의 집권은 곧 백성을 위한 어진 정치가 펼쳐진다는 결과를 의미한다. 이제껏 주인공인 그들은 완벽한 선역이었으며,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악역이다. 말하자면 '육룡이 나르샤'는 김영현 작가의 사극 중 최초로 악역을 주인공 삼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이방원의 개인적 욕심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고, 정도전의 신권중심주의와 이방원의 왕권중심주의가 충돌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수많은 살육을 감행하며 절대 왕권을 확립한 이방원의 행위에 당위성이 있으려면, 신권중심주의보다 왕권중심주의가 더 우월하다는 증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도전의 신권주의는 매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왕권주의와 민주주의의 중간 단계라고나 해야 할 것이었다. 구시대의 유물이자 독재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 왕권주의가 결코 넘볼 수 없는 경지의 세련된 정치 형태였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당파싸움 작태를 보면 신권이 강하다 해서 무조건 정치가 잘 되는 게 아님은 분명하지만..;;) 왕권주의가 더 우월하거나 백성을 위해 더 좋은 정치제도라는 확증이 없는 한, 이방원의 살인 퍼레이드를 변호할 길은 없다. 


그의 아들이 세종대왕이라는 사실 하나로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물론 태종이 확립해 놓은 절대왕권 덕분에 세종의 모든 업적은 얼마간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아니, 태종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세종이라는 임금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결과가 그랬다는 것일 뿐 '나중에 그렇게 되었으니 먼젓번 일들도 모두 잘한 셈'이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세종대왕의 탄생은 단지 운이 좋아서(또는 하늘의 뜻)였을 뿐, 운이 나빴다면 태종에게 세종 같은 아들이 없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연산 같은 폭군이 조선의 제4대 임금이 되어, 태종이 확립해 놓은 절대왕권을 신나게 휘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세종대왕의 존재는 태종의 잔혹 행위를 변호할 그 어떤 명분도 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도전(김명민)의 캐릭터라도 충분히 잘 살았으면 모르겠는데, 이방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다 보니 상대적으로 정도전은 능력없고 한심해 보이는 경우가 다수 발생했다. 김명민과 유아인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는 명품이었지만, 나는 좀처럼 '육룡이 나르샤'에 몰입할 수 없었다. 주인공이랍시고 은근히 이방원을 미화하는 듯한 전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작들에서와 달리 흐릿하게 표현된 러브라인도 성에 차지 않았다. 러브라인에 지나치게 공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기왕 집어넣었으면 제대로 표현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긴 이방원 같은 냉혈한에게 사랑 따위가 가당키나 하랴마는... 이방지(변요한)와 연희(정유미)의 러브라인이 그나마 좀 살았으나, 역시 스치듯 적은 분량에 충분한 역할은 다하지 못하였다. 모든 등장인물이 '대의'만을 향해 달려가느라 메마른 분위기를 적셔주진 못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내가 거북함 없이 몰입할 수 있었던 유일한 캐릭터는 바로 척사광(한예리)이었다. 최고의 검술을 지녔으나 그 누구보다 평범한 삶을 원했던 여인, 사랑하는 공양왕을 잃고도 복수할 생각조차 안 했던 순한 성품의 여인, 오직 공양왕이 남긴 아이만을 무사히 키우며 평생 조용히 살고자 했던 여인... 하지만 이방원의 무기고에서 공양왕의 어린 아들이 무참히 목숨을 잃게 되자 결국 그녀는 검을 잡고 일어선다. 다섯 명의 죄인을 죽이고자 함이었다. 첫째는 공양왕을 억지로 왕위에 세운 무명이요, 둘째와 셋째는 공양왕을 죽인 것도 모자라 왕씨 혈족의 씨를 말려버린 이성계와 정도전이요, 넷째는 최후의 희망이었던 공양왕의 아들을 죽게 만든 무기고의 주인 이방원이었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 스스로 밝힌 다섯째 죄인은 바로 '아무도 지키지 못한' 척사광 자신이었다. 



멀리 떠나려던 무휼(윤균상)과 분이(신세경)는 결국 옛정과 의리를 저버리지 못하고 되돌아와 이방원의 목숨을 구한다. 척사광의 네번째 원수가 이방원이니, 이방원을 지키려는 무휼이 척사광을 막는 것은 그 맥락에서 당연했다. 정도전과 연희도 죽은 판에 이방지가 왜 굳이 척사광과 열나게 싸우는지는 좀 이상했는데, 척사광이 첫번째 원수로 무명을 지목했으니 그 무명의 수장인 자기 모친 연향(전미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대충 짐작하면 될 것 같다. 아무튼 척사광은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삼한제일검 이방지와 조선제일검 무휼의 협공을 받게 되는데, 비웃듯 한 마디 던진 그녀의 대사가 인상 깊었다. ""그레, 그게 당신들의 대의겠지. 포은선생을 죽이고 전하(공양왕)를 죽이고 세운 새 나라에서, 서로 죽고 죽이다 못해 어린아이까지 죽이는 것!" 


척사광이 말한 아이는 공양왕의 아들이지만, 죽은 어린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를 나눈 이복형 이방원의 칼 아래 죽어간 이방석(정윤석) 또한 고작 열 몇 살의 어린애가 아니었던가! 그 잘난 대의, 대의를 부르짖으며 피바다 속에 새 나라를 세우더니만, 그 안에서 또 서로 죽이다 못해 어린애들까지 죽이고 마는 그 처참하고 한심한 작태를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으랴? 곡산검법의 후계자 척사광은 그렇듯 의연하게 죽어갔다. 숨을 거두기 전 "죽여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건네며... 지켜야 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 한 조각 미련없이 훌훌 떠나는 그 모습은 핏빛 노을 만큼이나 비감하고 아름다웠다. 



'육룡이 나르샤' 최종회에는 '뿌리깊은 나무'의 출연진이 대거 카메오로 출연하여 강력한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방원의 아역으로 열연했던 배우 남다름이 이번에는 세종 이도의 아역으로 출연해서 눈길을 끌었다. 또한 "정치는 나누는 것"이라던 정도전의 대사와 "살아있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던 분이의 대사를 어린 세종의 입으로 다시 말하게 함으로써 작품의 주제를 명백히 했다. 세종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끌어안고 정도전의 무덤가에서 숨을 거두는 분이의 모습까지... 육룡(?)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과 완벽한 정치는 훗날 세종대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그 결과를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50부작 대장정의 모든 피와 노력과 희생의 참된 의미를 오직 세종이라는 열매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적잖은 허탈함으로 다가온다. 결국 내 마음속에 남은 것은 '뿌리깊은 나무'의 깊은 여운 뿐이었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