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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었소' 고아성의 섬뜩한 변화, 정순왕후를 연상시킨다 본문

드라마를 보다

'풍문으로 들었소' 고아성의 섬뜩한 변화, 정순왕후를 연상시킨다

빛무리~ 2015. 4. 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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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볼만한 드라마가 하도 없어서 그냥 무심히 틀어놓고 있었을 뿐, 초반에는 그닥 흥미롭게 느끼지 못했던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들소')가 최근 엄청나게 재미있어졌다. 갓 스무 살의 여주인공 서봄(고아성)의 캐릭터가 무섭도록 급격히 변화하는데, 그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그런데 재미있기는 하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는 것이 함정이다. 쫄깃한 긴장감 속에서 '풍들소' 14회를 숨죽이고 시청한 후, 내 마음속에 남은 것은 씁쓸한 감정과 묘한 두려움이었다. 



서봄은 가난한 서민 가정의 둘째딸이며, 청소년 미혼모 출신의 중졸 여성이다. 19세가 되던 해 봄, 불장난같은 첫사랑으로 덜컥 임신을 한 후 고등학교에서는 자퇴를 해 버렸다. 그러나 만삭이 되어가던 어느 날, 기적과도 같은 인생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대학에 합격하면 만나자는 약속만 남긴 채 헤어졌던 첫사랑(즉 아이 아빠) 한인상(이준)이 서봄을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전혀 몰랐던 엄청난 사실이 있었으니, 한인상은 국내 상위 1% 이내에 속하는 명문 재벌가의 외아들이었다. 


한인상의 부친 한정호(유준상)는 국내 최대 로펌 '한송'의 대표이며, 그의 집안은 수대째 이어져 내려온 법조계의 로열패밀리다. 그의 아내이며 한인상의 모친인 최연희(유호정) 역시 재력과 권력을 겸비한 명문가 출신임은 물론이다. 현재 법무법인 '한송'의 고문을 맡고 있는 인물은 다름아닌 전직 총리니, 그 사실만으로도 '한송'을 이끄는 한정호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만하다. 서울 변두리 재개발 사각지대에서 찌그러져 살던 간판가게집 둘째딸 서봄이, 어느 날 갑자기 그런 한정호의 집안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는 재벌가의 아들치고 몹시도 순진하고 열정적인 한인상의 성품 덕분이었다. 한인상이 끝내 서봄의 손을 놓지 않겠다며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제 부모의 허락이 없더라도 혼인신고를 하고야 말겠다며 장인 장모까지 대동하고 서봄과 함께 구청으로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아이를 낳았어도 끝내 불가능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한정호는 서봄의 부모에게 엄청난 액수의 양육비와 지원금을 제안하며 서봄과 아이를 아들의 인생에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정재계를 손에 쥐고 흔드는 최고의 권력자도 아들의 막무가내 똥고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한정호와 최연희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구질구질한 서민 집안의 딸을 외며느리로 맞이하게 되었고, 서봄은 하루아침에 재벌 귀족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잔뜩 부른 배를 움켜쥐고 벌벌 떨며 처음으로 시댁을 방문하던 날, 처음 대면한 시부모 앞에서 진통을 느끼고 속수무책 피를 쏟으며 그 집안에서 아이를 출산하던 날, 그토록 민망하고 수치스런 모습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정식 며느리로 인정받게 된 후부터는 더 이상 기죽어 지낼 필요가 없었다. 명실상부한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미혼모였을 때는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아기의 존재가 지금은 오히려 서봄의 입지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일찌감치 아들을 낳아 귀족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소명을 마쳤으니, 이제 서봄에게 주어진 과제는 남편 한인상과 함께 최연소 사시 패스라는 업적을 달성하는 것뿐이다. 그 미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만 하면, 천덕꾸러기이며 성에 안 차는 며느리였던 서봄의 존재는 한정호 부부에게 있어 자랑거리이며 애정의 대상으로 변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인정받는 기회는 훨씬 더 일찍 찾아왔다. 사시는 커녕 고졸 검정고시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한정호와 최연희는 기꺼이 서봄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녀를 기특하게 여기며 감탄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 상황의 중심에는 서봄의 놀라운 변화가 있다. 그 변화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갑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서민의 딸이며 청소년 미혼모로서 이 사회의 '을' 신분이었던 서봄이, 재벌 귀족 가문의 며느리로 격상된 자신의 신분을 120% 활용하며 서슬 시퍼런 '갑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인 제공을 본인이 했기 때문에 희생양이라고 표현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 갑질의 최초 희생양이 된 사람은 최연희의 개인비서 이선숙(서정연)이다. 한정호는 저택 안에 스위트룸 수준의 공부방을 마련하고 최고 스펙의 과외선생 경태(허정도)를 초빙하여 아들 며느리의 최연소 사시 패스를 지원하고 있는데, 이선숙이 그 과외선생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만 것이 첫번째 화근이었다. 외로웠던 40대 노처녀의 불같은 사랑은 순식간에 선을 넘었고, 급기야는 과외선생을 만나러 공부방에 들어갔다가 그 안에 홀로 갇히고 말았다. 



그 모습을 목격한 서봄은 마치 태생부터 공주였던 것처럼 도도한 자세로 이선숙에게 훈계를 한다. 허락 없이 공부방에 들어간 행위와 조심성 없는 연애를 꾸짖으며, 최연희에게는 말하지 않을테니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하지만 내심 서봄을 얕잡아보고 있던 이선숙은 그런 서봄의 태도를 아니꼽게 여겼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도 후진 데다가 발랑 까져서 창피한 줄도 모르는 듯 배불뚝이 모양을 해가지고 이 기품있는 집안에 어기적거리며 들어서던 첫인상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기가 공주였다고, 작은 사모님이라 부르며 대접해 주니까 어린 것이 주제도 모르고 잘난체한다, 이선숙으로서는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만했다. 게다가 여고생 신분으로 혼전임신까지 했던 서봄이 조심성없는 연애를 한다면서 아랫사람을 꾸짖으면 씨알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서봄이 이선숙을 꾸짖는 그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최연희는 벌써부터 '제대로 윗사람 노릇을 할 줄 아는' 서봄의 발전(?)에 몹시 흐뭇해하고 기꺼워한다. 


어린 며느리가 한참 나이 많은 이비서에게 '갑질'을 했다는 소식을 아내로부터 전해들은 한정호 역시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그 아이는 '힘에 대한 감각'을 타고났군. 역시 이종교배를 두려워하면 발전이 없어!" 한정호는 제 핏줄이지만 너무 착하고 순진한 한인상이 내심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한인상뿐 아니라 그 여동생 한이지(박소영)도 순진하기는 마찬가지다. 진짜 공주 신분이면서도 가난한 서민 출신 올케 서봄을 무시하거나 얄밉게 굴기는 커녕 오히려 늘상 그녀 편을 들어준 착한 여고생이다. 



한정호는 힘을 가졌으면서도 그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모르는 착하고 순진한 아들 딸에게 '힘에 대한 감각'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천성이란 웬만큼 타고나는 것이라서 가르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아마도 한인상과 한이지는 너무 순진해서 약간 맹한 구석이 엿보이는 엄마 최연희를 닮은 것 같다. 그런 와중에 '힘에 대한 감각'을 타고나 가르칠 필요도 없는 똑똑한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순진한 한인상의 곁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흡족해하는 듯 한정호는 '이종교배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것이다. 


서봄의 갑질이 극도에 달한 사건은 뜻밖에도 '약점'에서 비롯되었다. 서봄의 친정 언니 서누리(공승연)는 아나운서를 꿈꾸며 성공에 목말라 있던 차, 동생 서봄이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가면서 살짝 그 덕을 보게 되자 생전 처음 누려보는 상류층 생활의 달콤함에 취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나도 봄이처럼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바람기 다분한 조세영이 추파를 던지자 서누리는 옳타꾸나 그와 함께 상류층 자제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은근슬쩍 한정호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의 가족이라는 식으로 어필도 했다. 


조세영과 하룻밤을 보낸 서누리는 재벌가 아들과의 달콤한 연애를 꿈꾸지만, 조세영은 미련없이 다음 날 아침부터 연락을 끊었다. 단지 하룻밤 노리개 역할만 하고 버림받은 것이다. 모임에 참석했던 멤버들의 입을 통해 지저분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가고 서누리는 회사 내에서까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친정 언니가 사고를 쳐서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서봄의 입장도 적잖이 난처해졌다. 서봄은 불쾌해하는 시부모에게 간략히 사과한 후 뒷수습을 하겠다며 비서 이선숙을 대동하고 서누리를 만나러 나갔다. 



언니 앞에서 서봄은 재벌가 며느리의 고고한 자세를 유지했다. 핏줄이지만 이제 너와 나는 신분이 달라, 하고 못박는 듯한 태도였다. 후회와 수치스러움을 견디다 못한 서누리가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며 대들어 보았지만, 서봄은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딱해. 욕심이 과했어. 초조했나봐." 동생 앞에서 더 이상 자존심을 세울 수 없게 된 서누리는 울음을 터뜨린다. "우리 시댁에서는 물의를 빚는 걸 제일 싫어하셔. 언니는 이미 싫은 짓을 했어." 


"어떤 이유에서건 언니가 한송에 잘 보이고 싶다면 그걸 명심해야 할 거야. 너무 겁먹지 말고 조용히 처분을 기다리면 좋겠어!" 서봄이 내리찍듯이 말한다. 말로는 하나뿐인 언니고 사랑하는 자매라지만, 이미 둘 사이의 분위기는 거의 주종관계에 가까워 보인다. 언니를 눈물 콧물 쏙 빠지게 혼내준 후,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봄은 이선숙에게 최후 경고를 한다. 며칠간 서누리의 일로 약점을 잡았다며 희희낙락하는 등, 뒤에서 자신과 친정 식구들의 험담을 하는 이선숙을 보며 칼날을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운전기사를 내보내고 이선숙을 자신의 옆자리로 불러 앉힌 서봄은 말한다. "몇 가지 말씀드릴게요. 우선 저희 친정 식구들 흉보지 마세요. 아니 뭐라고 말씀하시건 상관없는데 저 안 듣게 해주시고요, 어쩔 수 없이 제가 들었을 땐 자기 말에 책임을 지세요. 무슨 뜻인가 하면요, 어머님은 이비서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시죠? 그런데 저는 아니에요. 영원히 없어도 아쉽지 않아요. 이제 진짜 비서가 되세요. 저같은 사람한테 필요한 존재요. 프로란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나한테 밉보이면 너 잘라버릴 거야" 라는 뜻의 살벌한 경고였다. 고용권을 쥐고 있는 절대 갑으로서의 힘을 제대로 행사한 것이다. 15년 전부터 최연희를 보필해 온 이선숙이지만, 갓 스무 살의 어린 서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오너 가문의 위세란 그토록 대단한 것이었다. 서봄이 하려고만 하면 정말 자신을 해고시킬 수도 있는 존재임을 비로소 깨달은 이선숙은 제발로 찾아가 서봄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한 조각 남은 자존심마저 버릴 수밖에 없었던, 완벽한 패배였다. 



서봄은 언니 서누리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위해, 자신에게 항복한 이선숙을 철저히 이용한다. 한정호와 조세영의 집안 사이에 과거 알력이 있었음을 한인상으로부터 들은 서봄은, 조세영이 의도적으로 한송에 흠집을 내기 위해 사돈 아가씨인 서누리를 농락한 것으로 꾸며 한정호를 분노시킬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선숙은 그 역할을 자신이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자신없어했지만, 거의 협박에 가까운 서봄의 눈빛에 굴복하고는 최선을 다해 그 명령을 수행한다. 


한정호의 최측근인 비서 양재화(길해연)는 이선숙에게 약점을 잡힌 부분이 있었고, 결국 서봄의 계략대로 한정호는 조세영에게 분노하여 권력의 일침을 가하기에 이른다. 잔뜩 겁을 먹은 조세영은 서누리의 직장까지 찾아와 사과하며 매달리고, 서누리에 관한 소문은 삽시간에 180도 뒤집힌다. 하룻밤 노리개로 이용당한 후 버려졌다는 소문에서, 오히려 조세영이 서누리에게 목을 매며 쫓아다녔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는 소문으로 바뀐 것이다. 완벽한 승리였다. 



일이 잘 해결되자 서봄은 이선숙에게 "수고하셨어요"라며 칭찬의 말을 건넸고, 이선숙은 "보람 있었습니다, 작은 사모님!" 하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멀찌감치서 목격한 한정호는 비로소 자신이 며느리의 계략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양비서, 아무래도 저 애가 나를 아주 잘 써먹은 것 같은데?" 한정호의 물음에 양재화가 대답한다. "쓰리쿠션입니다, 대표님! 잘 키우십시오." 두 사람 모두 서봄의 영특함에 감탄하며, 이용당했음에도 불쾌함보다는 흐뭇함이 깃든 목소리다. 그들뿐 아니라 한송에 복수를 꿈꾸는 비서 민주영(장소연)까지도 서봄에게 관심을 가지며, 차도지계까지 쓸 줄 아는 그 영민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종류의 영특함이 과연 칭찬받을만한 일인지. 내가 보기에는 기특한 게 아니라 섬뜩할만큼 무섭게 느껴지고, 한정호가 말한 '힘에 대한 감각'을 너무 어린 나이부터 빠삭하게 알고 있는 모습은 매우 징그럽게 느껴진다.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소탈한 태도로 대하는 것을 보면 무차별적으로 갑질을 할만큼 막돼먹은 성품은 아니지만,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의 엄마뻘 되는 이선숙을 잘근잘근 밟으며 힘을 과시하는 모습은 좋게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선숙이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고용주인 최연희도 아니고 갓 들어온 며느리에게 그런 협박을 받고 무릎까지 꿇어야 할 만큼은 아니었다. 


소녀의 모습을 채 벗지 못한 서봄이 형형한 눈빛으로 갑질하는 모습을 보며, 내 머릿속에는 조선시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떠올랐다.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66세의 영조는 홀아비가 되었고, 새 중전 간택에 뽑혀 시집오게 된 정순왕후는 고작 15세였더랬다. 남편인 영조보다는 무려 51세 연하였고, 아들 내외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보다도 10세 연하였다. 언뜻 생각하면 하필 늙은 남편에게 시집을 와서 구중궁궐 안에 갇혀버린 신세에, 저보다 열 살이나 많은 세자 내외를 대하기도 껄끄러울 테니 어린 중전은 풀이 죽은 채 조용히 지냈을 것도 같은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래 전 '대왕의 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작품에서는 혜경궁의 친정 아버지인 홍봉한이 딸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가난하고 세력 없는 집안 출신의 정순왕후를 적극 추천한 것으로 나왔다. 정순왕후의 입장에서 본다면 혜경궁과 홍봉한은 자신의 집안을 호된 가난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은인이었다. 그러나 일단 중전의 자리에 앉게 되자, 이전까지의 순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소녀의 눈빛은 표독함으로 가득찼다. 정순왕후 역을 맡은 배우는 당시 18세의 이인혜였고, 혜경궁 역할은 31세의 홍리나였다. 


어느 날 정순왕후는 별 일 아닌 트집을 잡아 뭇 궁녀들이 보는 앞에서 혜경궁의 종아리를 쳤다. 30대의 원숙한 여인이 솜털 보송한 10대 소녀 앞에서 꼼짝없이 종아리를 걷고 매를 맞는 모습은 더할 수 없이 비참해 보였다. 홍리나와 이인혜의 실제 나이차가 커서인지 그 민망함과 처량한 분위기는 매우 실감이 났고, 억울함과 분함에 흘리는 혜경궁의 눈물에도 십분 공감이 되었다. 그런데 스무 살 서봄에게 모질게 당하고 돌아와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이선숙을 보는 순간, 당시 홍리나의 눈물이 오버랩되는 느낌이었다. 


노론파 출신이었던 정순왕후는 노론파 대신들이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갈 때 적잖은 역할을 했으며, 죽은 아비의 뒤를 이어 세손이 된 정조 이산의 목숨도 수시로 위협했다고 전해진다. 영조가 그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분노가 일어 왕비를 내치려 하였으나, 어린 왕비가 이 구중심처에서 그나마 권력에 대한 욕심이라도 갖지 못했다면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하는 가엾은 생각에 차마 내치지 못하고 중궁에 머물며 나오지 못하게 하는 연금형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훗날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스스로 여자국왕(女王, 女君)을 칭하며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녀는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고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정조의 이복동생들과 혜경궁의 친정 아우들도 그 때 처형당했다. 그리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 질서를 부정하였다. 


또한 남인과 시파 쪽에 천주교 신자가 많다는 점에 착안한 정순왕후는 정적 제거의 목적으로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키니, 그것이 바로 신유박해다. 오가작통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애꿎은 피해자가 엄청나게 발생했다. 자신의 권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수백 명의 죄없는 목숨을 앗아갈 만큼 악독한 그녀의 성품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가난하고 세력없는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홍봉한의 추천을 받아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 정순왕후로서는 일종의 오기와 컴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젠 내가 너희들보다 더 윗자리에 있고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당파 싸움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겠지만, 특히 사도세자와 혜경궁 내외를 혹독하게 쥐잡듯이 한 이유는 개인적 감정의 발로도 섞여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선숙이 서봄에게 사과를 하겠다며 찾아갔을 때, 서봄의 대사 역시 정순왕후의 그런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사과를 하신다면 받기는 하겠는데요, 이비서는 아직도 저를 그 때 그 이상한 애로밖에 안 보시는 것 같아요. 이 댁에 처음 온 날, 택시에서 내려가지고 배 가리던 애요!" 그럼 그렇지, 아무리 태연한 표정으로 당당한 척해봤자 고작 스무 살의 소녀인데, 어찌 낯선 사람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다 보이고도 수치심이 없었을까? 시부모는 물론 집안의 아랫 사람들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수치스럽고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봄의 마음속에도 사실은 그런 종류의 응어리가 있었던 것이다. 


집안이며 학벌이며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처지에 그런 식으로 이 귀족 가문에 입성했으니, 자신의 불안한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독해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원래부터 가진 사람은 독해질 필요가 없으나, 원래 제 몫이 아니었던 것을 운 좋게 차지한 사람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독해진다. 그래서 은연중에 자기를 무시하는 듯 보이는 이비서를 타겟으로 삼아, 보란듯이 잘근잘근 철저하게 밟아준 것이다. 이제 그녀의 섬뜩한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심리를 좀 알 것 같다. 


서봄의 캐릭터가 악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영악한 인물이 앞으로는 얼마나 더 무섭게 변해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짐작컨대 앞으로 10~15년쯤의 세월이 흐른 후, 법무법인 한송의 최고 실세는 바로 서봄이 아닐까 싶다. 아직은 순진해야 마땅할 스무 살에 이 정도인데, 그 전쟁통 같은 사회에서 10년 동안 공부와 훈련을 거듭한 후에는 어찌 되겠는가? 천성적으로 순진한 한인상과 최연희는 물론이거니와 한정호까지도 그녀를 감당할 수 없을 듯한데, 지금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호랑이 새끼를 키웠음을 알고 땅을 치며 후회할 날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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