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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를 향한 과도한 비난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뿐이다 본문

스타와 이슈

황보를 향한 과도한 비난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뿐이다

빛무리~ 2014. 12. 1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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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경비원을 향한 주민들의 도 넘은 갑질 때문에 어떤 아저씨는 상심하여 자살하고 또 어떤 아저씨는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졌다는 천인공노할 뉴스들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는 요즘, 가수 황보가 정말 눈치없게도 자기네 아파트 경비원을 향한 불만의 글을 SNS에 올리면서 온갖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비난이 폭주하자 황보는 해당 글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지만, 이미 해당 글은 수없이 캡처되어 웹상에 떠돌고 있으며 비난의 목소리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황보의 행동에 부적절한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첫째, 아파트 경비원의 불친절함에 화가 났다면 개인적으로 관리실에 연락해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면 친구와 통화를 했어도 좋을 일이다. 그런데 굳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볼 수 있는 SNS에 글을 올린 행위는 유명인으로서 적절한 처신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둘째, "힘드시면 일 그만두셨으면 좋겠다"는 말과 "경비아저씨 눈치보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에는 심각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황보는 그저 울컥하는 마음에 쓴 표현이겠지만, 자칫하면 제대로 갑질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욱하는 마음에 저지른 단순 실수일 뿐, 그 몇 줄의 SNS 문장을 이유로 황보의 인성을 판단하거나 비난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황보는 그저 자신의 일시적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것일 뿐, 특정 경비원의 신상정보를 발설한 것도 아니고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행한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실수는 맞지만 치명적 실수는 아니며, 과도한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사냥하듯이 황보를 비난해대는 일부 대중의 과격한 반응을 보면, 오히려 그들로부터 드러나는 이 사회의 폭력성에 한숨짓게 된다. 


더욱이 대중의 이러한 반응을 부추기는 언론의 작태는 더욱 섬뜩하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자신의 SNS에 "악마를 보았다. 인간들 무섭다"라는 글과 함께 분신 사건이 일어난 아파트의 경비원 해고 기사를 링크했는데, 그 행동이 황보를 우회적으로 꼬집은 거라고 해석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더불어 경비아저씨들의 이름까지 기억한다는 '친절한 유재석'을 언급하며 "유재석과 황보, 어쩌면 이렇게도 다를까?" 하는 식의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낸 기사들도 무수히 쏟아졌다. 


진중권 교수가 '악마'라고 표현한 대상은 황보가 아니다. 한 경비원이 억울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마땅히 잘못된 점을 시정하여 남아있는 경비원들의 처우를 개선해 주어야 인간된 도리이거늘, 오히려 남은 경비원들 모두를 해고해 버렸다니 그 비인간적인 처사를 가리쳐 '악마와도 같다'고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애꿎은 유재석은 왜 끌어들여 갖다붙이는가? 유재석과 황보를 비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유재석처럼 살고 있다 자부할 수 있을까? 세상 사람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다. 


이와 같은 현상에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따로 있다. 갑이든 을이든, 다시 말해 힘 있는 사람이든 힘 없는 사람이든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나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인데, 세상에 '을'이라 인식되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마땅히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질 가능성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지금껏 살면서 갑이니 을이니 하는 인식을 거의 갖지 않고 살아왔기에, 모든 사람의 관계가 갑을관계로 규정되는 현실의 풍토가 매우 당혹스럽다.



 

갑이든 을이든, 힘 있는 사람이든 힘 없는 사람이든,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며 예의를 다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기본 원칙이다. (비록 현실적으로 안 지켜지는 경우가 더 많지만) 택시기사와 승객도, 버스기사와 승객도, 가게 주인과 손님도, 아파트 주민과 경비원도, 콜센터 상담원과 고객도,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택시 버스 기사나 가게 주인이나 아파트 경비원이나 콜센터 상담원은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므로 진상 고객(또는 주민)에게 시달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말하자면 그들은 '을'이다. 


나 역시 그런 종류의 일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을'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을이라고 해서 언제나 을 노릇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손님'의 입장이 되었을 때를 돌이켜 보자. 버스 또는 택시기사의 과도한 불친절 때문에 중간에 내리고 싶을 만큼 (또는 진짜 내렸을 만큼) 화가 났던 적이 없는가? 음식점을 비롯한 가게에 들어섰을 때, 주인의 부당한 대우에 억울하고 속상했던 적이 없는가? 심지어 콜센터 상담원이 대놓고 불친절하게 틱틱거려서 황당했던 경험은 없는가? 나는 이 모든 경험이 다 있다. (개인적으로 경비원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지만,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특히 자신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젊은 사람에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경우는 매우 허다하게 발생하는 상황이다. 서른 살 즈음의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우산을 쓰고 길을 걷던 나는 빵을 사기 위해 제과점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려 했다. 손에는 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든 채였다. 그런데 한 발짝 들어서는 순간 50~60대쯤으로 보이는 빵집 주인 아저씨가 나에게 말했다. "우산은 밖에 놓고 들어와!" 나는 즉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빵집을 그냥 나와버렸고, 다시는 그 제과점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아저씨 왜 저한테 반말하세요?"라고 항의했다면, 과연 손님이랍시고 갑질하는 행위였을까? 아니, 그건 부당함에 대한 정당한 항의였겠지만 내가 꾹 참고 대응하지 않은 것뿐이다. 


경비원의 어떤 행동 때문에 황보가 그토록 분개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짐작컨대 젊은 여자라서 무시당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유명 연예인이긴 하지만 노인네가 TV를 안 보시면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아저씨는 원래 '갑'의 위치에 익숙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중소기업 사장이었는데 하루아침에 폭삭 망해서 온 가족이 거리에 나앉게 된 바람에 경비원 일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현재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원래 늘 하던대로 행동했을 수도 있다. 사람의 몸에 밴 행동이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니까. 


황보의 트위터 내용을 보면 "주민에게 저렇게 짜증내시지 말았으면 좋겠다" 라는 부분이 있다. 만약 황보처럼 젊은 여자가 아니라 중후한 양복 차림에 백발이 희끗한 노년의 신사였다면, 과연 그 사람을 경비원이 짜증스런 어조로 상대할 수 있었을까? 황보의 행동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속상하고 답답하면 그랬을지 나는 황보의 마음을 십중팔구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화난다. 화를 낼 수 없으니 화가 난다. 그냥 내가 죄송해요 하는 게 낫다" 라는 부분에서는 특히 더욱 큰 공감이 된다. 아무리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져도 아버지뻘 되는 경비원 아저씨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까. 과연 이런 경우에도 경비원이 무조건 '을'일까? 


언제나 세상은 힘 있는 자의 편이니까, 가능한 한 힘 없는 자들의 편에서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인간 세상의 갑을 관계가 어느 경우에나 단순하고 명확하지는 않다는 점과, 을의 입장이 항상 옳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똑똑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황보를 향한 과도한 비난은 약자를 옹호한다는 빌미로 행해진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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