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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현빈, 너무나 인간적인 임금 정조의 슬픔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역린' 현빈, 너무나 인간적인 임금 정조의 슬픔

빛무리~ 2014. 5. 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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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전 기자들의 평점이 낮다고 해서 큰 기대를 품지 않고 관람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취향에 맞아서인지, 나에게 '역린'은 썩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평점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스토리가 매우 빈약하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드는 작품이라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으니 스토리보다는 각각의 캐릭터에 비중을 둔 모양인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영화를 보는 내내 추후의 전개가 거의 궁금하지 않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한껏 비장미를 뽐내며 긴박하게 움직이는데, 관객 중 몇몇은 좀처럼 몰입이 안 되는지 줄곧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배우들의 연기에 꽤나 몰입하고 있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1777년(정조 1년)에 발생한 '정유역변'이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나, 즉위한지 1년만에 발생한 대규모 암살 시도 '정유역변'을 미리 알아채고 일망타진하면서 오히려 왕권 강화의 초석으로 삼았다고 한다. 제대 후 3년만에 스크린으로 컴백한 현빈은 외로운 청년 임금 정조의 슬픔과 고뇌를 제법 잘 표현했다. 정조는 매우 다양한 측면을 지닌 인물이므로 제작진의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캐릭터로 탄생할 수 있는데, 현빈을 통해 표현된 '역린'의 정조는 강인하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임금이었다. 그 내면의 고뇌와 슬픔이 작품 전체에 켜켜이 스며들어, 강한 군주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기 보다는 쓰라린 연민을 느끼게 한다.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정조의 곁에는 없었다. 견고한 당파를 이루어 날마다 임금의 목을 옥죄는 신하들은 물론 내관들과 궁녀들까지, 의심없는 눈으로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혹시 독이 풀렸을까 물 한 잔 시원히 들이킬 수 없고 어디서 칼이 날아들까 평온한 침상에 몸을 누이지도 못했던... 살기 위해 깨어 있으려고 밤새 책을 읽었으며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종일 무예를 익혔다던 정조의 삶을 떠올리면, 전생에 죄가 많아야 임금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허황되지 않은 듯 싶다. 그러나 기품있는 용포의 자태, 맨몸의 조각같은 근육, 백마를 타고 광야를 휘달리며 활시위를 당기던 호쾌한 모습... 쉴새없이 호강하는 눈 때문에 현빈의 정조를 바라보는 심정은 슬프면서도 감미롭다. (이후 약간의 스포 있음)

 

 

정유역변을 일으킨 주동세력은 물론 임금을 적대시하던 노론 벽파의 양반들이었으나, 실제로 대궐에 침투했던 살수의 상당수는 천민 출신의 하수인들이었다고 한다. 을수(조정석)는 바로 그 점에 착안하여 창조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천민 고아들을 붙잡아다가 살수로 키워내는 사이코패스 '광백' 역할은 조재현이 맡았는데, 캐릭터 자체는 단순하지만 명품배우 조재현의 연기가 아주 볼만하다. 그리고 정조의 신임을 받던 내관 상책(정재영)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은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데, 큰 임팩트는 없지만 나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약간이나마 스토리에 활력을 준다. 겉으로는 주군과 심복이지만 속으로는 친구였던 그들 사이에 흐르는 애틋한 감정이 심금을 울린다. 

 

궁금증과 긴박감을 더하기 위해서는 가상의 인물인 광백, 상책(갑수), 을수의 비중을 좀 더 크게 잡았어야 할 것 같다. 실존 인물들의 행적이야 어차피 정해져 있는 셈이니까. 일례로 '광해'의 경우, 똑같은 배우 이병헌이 연기했어도 실존 임금 '광해'의 캐릭터보다는 가짜 임금 '하선'의 캐릭터에 더 관심이 쏠리지 않던가? 관객이 하선의 캐릭터에 몰입하고 그의 내면에 공감하면서 '광해'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역린'의 초점은 절대적으로 정조에게 맞춰져 가상 인물들의 활약은 매우 제한적이고, 그로써 창조와 변화의 가능성이 대폭 축소되었으니 흥미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궁녀 강월혜(정은채)의 캐릭터는 매우 성공적인데, 실존 인물이면서도 이만큼 역동적인 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빈약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고 손자뻘인 정조보다 겨우 7살 연상이었다. 꽃다운 15세 소녀가 66세 영조의 후처로 시집을 왔으니 따지고 보면 비련의 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그녀의 지독한 행적은 먼 훗날까지 악명을 떨치게 된다. '역린'에서는 그 동안 선역을 주로 맡았던 한지민이 대비 정순왕후의 역할을 맡아 소름끼치는 악녀 연기에 도전하는데, 너무나 고혹적이고 아름다워선지 전혀 미운 마음이 생기질 않는다. 저토록 화사하고 젊은 여인이 궁궐 뒷방에 처박혀 평생 과부로 늙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딱하게 느껴진다.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 역할은 김성령이 맡았는데 어쩐지 그녀가 더 악역같다.

 

여배우 김성령의 외적인 느낌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역린'이 혜경궁 홍씨에 대해 전통적 시각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적용한 이유가 크다. 괴팍한 시아버지 때문에 남편 사도세자를 잃어버린 가여운 과부가 아니라, 노론 세력인 친정과 결탁하여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일조한 여인이라고 말이다. "예전에는 우리, 같은 편이었잖아요? 지아비는 팔아먹어도 아들은 그럴 수 없다는 건가요?" 정순대비의 비아냥에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아니라고 말 못하는 혜경궁이다. 남편을 포기하면서까지 살려낸 아들, 정조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기에 무슨 짓이든 못할 게 없다. 어린 생각시 '복빙'에게 위험천만한 대비의 독살을 사주할 만큼 냉혹하기도 하다. '복빙'으로 분한 아역배우 유은미의 연기가 아주 볼만하다. 유은미는 현재 드라마 '왔다! 장보리'에서도 열연중이다.

 

 

정조의 곁을 든든히 지키는 심복 홍국영(박성웅)의 존재는 고맙게 느껴지나, 그 역시 얼마 못 가 권력의 단맛에 취하면서 정조와의 의리를 저버리게 될 것을 알기에 서글프다. 일단 역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고, 정순대비와 노론 세력은 자숙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조는 이제 겨우 한 고비를 넘겼을 뿐 그의 앞길에는 아직 수많은 고비가 남아 있고,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옷자락은 또 다시 붉은 피로 물들 것이다. 피바람 속에 아끼는 혈육들은 우수수 떨어져 나갈 것이고, 차가운 배신의 칼은 날마다 머리와 가슴을 위협할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백마를 타고 달리며 소리없이 외친다. "조금씩, 최선을 다해, 하나씩 바꿔 간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수백 년 전에 살다 간 청년 임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었다. 비록 현실은 어둡고 우울하지만, 질긴 믿음과 희망으로 굳건히 살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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