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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딸 수백향' 무리한 해피엔딩이 슬펐던 이유 본문

드라마를 보다

'제왕의 딸 수백향' 무리한 해피엔딩이 슬펐던 이유

빛무리~ 2014. 3. 15.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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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하긴 대다수 시청자들의 마음은 억지스러워도 해피엔딩을 원했을 테지만,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 드라마에 깊은 애착을 품었던 내 마음은 오히려 슬퍼졌다. 왜일까? 나는 평소 사극의 역사 왜곡 논란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었는데, 유독 '제왕의 딸 수백향' 에만 꼼꼼한 고증과 역사 재현을 바랐던 것일까?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역사적 기록과 드라마 내용의 일치가 아니라, 제목과 주제에 걸맞는 엔딩이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제목과 주제에 어긋나는 엔딩을 맞이한다면, 화룡점정을 찍으려다가 그림을 아예 망쳐버리는 셈이니 이보다 더 애통한 일이 흔히 있으랴! '제왕의 딸, 수백향' 이라는 제목은 바로 주인공 설난(서현진)의 운명과 일치되어 있었다. 설난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에도 '제왕의 딸'이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왕의 딸'로 시작했던 설난의 운명은 어처구니 없게도 '제왕의 아내', 또는 '제왕의 여자'로 끝맺고 말았다.  

 

 

작가는 주인공 두 남녀의 사랑을 이루어 주는 것이 정말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무령왕(이재룡)의 양아들 명농(조현재)과 친딸 설난은 결국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인가? 물론 쉽지 않은 길을 각오하면서도 함께 하기를 선택한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충분히 사랑을 얻을 자격과 행복해질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의 완성도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일차적으로 중요시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 방송 초반에 있었던 역사 왜곡 논란도 해결되기는 커녕 처음보다 더욱 강렬해질 수 있다. 당시 왜곡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견해는 여주인공 수백향이 백제의 공주가 아니라 일본의 황후라는 것과, 무령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성왕(명농)은 무령왕의 친자일 뿐 극 중에서처럼 동성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하여 나름대로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는데, 일단 '수백향'이라는 여인의 존재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도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 없다 싶었고, 굳이 역사의 기록과 일치시키고 싶다면 백제의 공주로서 일본 황실에 출가하면 되지 않을까 하였다. 성왕의 부친이 무령왕이냐 동성왕이냐 하는 문제는 비교적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또한 예술 작품으로서의 창조적 영역을 조금만 더 넓게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극 중에서처럼 무령왕의 측근 1~2명만이 그 비밀을 아는 채 묵묵히 덮어 두었다면, 역사에는 성왕이 무령왕의 아들로 기록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사실상 그 오래된 책 너머의 숨겨진 진실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만약 성군의 인품을 갖춘 명농을 제치고 좁은 그릇의 진무(전태수)가 보위를 이어받았다면, 역사 왜곡 논란은 깨끗이 사라지겠으나 작품의 감동과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졌을 것 같다.

 

 

그토록 흠모하던 무령왕이 자신의 친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임종을 지키는 자리마저 그 친아들인 진무에게 양보한 명농이었다. 하지만 무령왕의 유언 때문에 왕위까지는 양보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금빛 찬란한 용포를 입고 옥좌에 앉은 명농의 얼굴에서는 참으로 임금다운 빛이 났다. 개인적 설움일랑 모두 떨쳐내고 왕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명농 쪽은 이제 됐고... 설난은...? 갑자기 일본으로 시집가는 설정이 생뚱맞다면, 그저 그렇게 초야에 묻힌 채 가여운 설희(서우)를 보듬으며 살아가도 좋을 것이었다. 장덕 도림(차화연)에게 보낸 편지의구절처럼 "백제 변방의 땅을 기름지게 갈아, 백제의 백성으로 잘 사는 것으로 충심을 대신하면서" 말이다.


수백향 꽃잎이 바람에 흩날릴 때, 설난은 기도했다. "수백향 꽃이 피면... 마음에 그리움이 쌓였던 자들은 그리움을 녹여 행복하게 웃는 법을 배우고... 오래된 정인들은 그간의 정이 더욱 깊어진다지요...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 죄를 뉘우치고... 웃음을 잃었던 사람들도 이 날만은 웃게 된다지요... 폐하, 언제나 강건하시고 평안하소서!... 소녀, 웅진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에서 평생토록 폐하와 폐하의 강산을 위해 빌 것이오니..." 바로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랬다면 '수백향'은 끝까지 '제왕의 딸'로 남을 수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내 머릿속에는 유태인 집단수용소에서 이름모를 소녀가 남겼다는 싯귀가 떠올랐다. "내일부터는 슬퍼지겠지... 오늘이 아니고 내일부터는... 오늘은 기뻐할거야!" 비록 멀리 헤어져 그리움 속에 살아간다 해도, 비록 백제와 성왕의 앞날에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 해도, 수백향 꽃잎이 흩날리는 이 때만은 모두 행복하게 웃을 수 있으니, 그만하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좌평 내숙(정성모)으로부터 설난이 무령왕의 친딸이었음을 전해들은 명농은 이제껏 그녀가 자신을 피해왔던 진짜 이유를 알게 되고 그녀를 찾아 나섰다. 너 없이 사는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며, 눈처럼 흩날리는 수백향 꽃잎 속에서 설난을 품어안는 명농의 모습은 거부하기 힘들 만큼 매혹적이었다. 눈물 가득한 시선으로 명농을 올려다보는 설난의 눈빛은 더없이 맑고 투명했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서현진이라는 여배우의 놀라운 진가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어차피 친남매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랴 싶기도 했다. 심지어 죽은 무령왕이 설난의 꿈 속에 나타나 두 사람의 결합을 축복하지 않았던가? "너와 명농만은... 사내로서, 여인으로서 행복하기를 소원한다!" 아마도 사랑하는 채화(명세빈)와 백년해로하지 못한 슬픔이 뼈에 사무치게 깊었던 모양이다. 그래, 이로써 무령왕의 소원도 풀어주고 다수 시청자들의 마음도 흐뭇해졌으니, 최선의 결말이었을까?

 

하지만 애초의 기획의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처음부터 '수백향'은 자신의 행복을 이루는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제왕의 딸로서, 백제를 위해 끝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캐릭터였다."백제를 위해 많은 것을 지키고 이루고 얻었던 여인... 하지만 끝내 맺지 못한 백제 태자 명농과의 위대한 사랑... 이제 백제의 향기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여인, 수백향을 만나보자!" 드라마가 종영한 지금까지도 홈페이지에는 버젓이 처음의 기획의도가 남아있다. 그런데 설난은 결국 자기 행복을 위해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 오라비와 결혼하여 백제의 황후가 되고 말았다. 한 나라의 공주이면서 동시에 황후일 수는 없으니, 황후가 된다면 더 이상 공주가 아니다. 이로써 '제왕의 딸, 수백향'이라는 제목은 어불성설이 되었고 작품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작가의 안타까운 이 선택을 어쩌면 좋으랴? 내 마음은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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