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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누나' 왠지 눈물겹던 승기의 노트, 그리고 미연의 한 마디 말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꽃보다 누나' 왠지 눈물겹던 승기의 노트, 그리고 미연의 한 마디 말

빛무리~ 2013. 12. 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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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이틀만의 눈부신 발전이었다. 이승기는 확실히 '짐'에서 '짐꾼'으로 진화하는 중이었고, 그 진화의 과정은 쉼 없이 돌아가는 카메라에 그대로 잡혀 생생히 전달되었다. 터키에서 본의 아니게도 살아있는 짐짝 노릇을 하며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던지, 크로아티아로 떠나는 날은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나 씻지도 않은 채 몇 시간이나 가이드북을 예습하며 심기일전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무경험에서 비롯되는 실수들이 밤새워 공부한다고 단숨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이승기는 크로아티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짐 날라주는 포터를 공짜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적잖은 돈을 날리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맹한 모습을 보였으니 누나들의 믿음을 얻기란 아직도 머나먼 일이었다.

 

초보 짐꾼 이승기의 든든한 조력자는 역시 막내 누나 이미연이었다. 저녁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공항버스 막차 시간이 가까웠는데, 이미연이 대신 달려가 환전을 해주지 않았다면 이승기 혼자서 버스 타는 곳을 알아보고 환전까지 하기는 벅찬 상황이었다.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 김자옥이 말했다. "승기는 미연이 누나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해. 그래도 저 애가 같이 뛰어다녀 줘서..." 이승기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자 윤여정이 말했다. "그냥 누나하고 결혼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승기도 웃으며 "그럼 신혼여행은 터키랑 크로아티아로..." 하면서 넉살좋게 받았다. 잠시 후 누나들이 침묵 속에서 고요히 피로를 달래는 동안, 이승기는 혼자서 뭔가를 계속 공부하고 있었다.

 

 

공항버스에서 내린 후에는 트램(노면전차)을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이승기는 누나들에게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티켓 사 올게요" 라고 말하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버렸다. 남겨진 누나들은 불안에 잠겼다. 승기가 기다리라고 한 장소는 하필 트램 정류장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 옆이었기 때문이다. 윤여정이 말했다. "이 애가 버스 티켓을 사 오면 어떡하니? 미연아, 얼른 승기 찾아 봐!" 어리바리 짐꾼 이승기를 누나들은 당최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기는 정확한 장소에서 정확히 트램 티켓을 구입해 돌아왔고, "6번 정도"라는 자신없는 표현으로 웃음을 주긴 했지만 어쨌든 정확히 6번 트램에 탑승하도록 누나들을 인도했다.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느라 조금씩 늦어지기는 햇지만, 그래도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 발전의 원동력은 한 권의 노트였다. 마치 중학시절 영단어를 외울 때처럼 손글씨로 크로아티아 단어와 한글 해석을 번갈아 써놓은 이승기의 노트를 보고 나영석 PD는 데굴데굴 굴렀으며, 작가들은 그것을 '중딩소울 순수노트'라 명명했다. 갓 눈 뜬 새벽의 숙소에서, 비행기와 공항버스 안에서, 각종 생활 단어와 지명(地名)과 간략한 문장들을 찾아 적어 놓았던 그 노트는 상당히 유용했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어깨가 결릴 정도였다고 이승기는 말했다.) 덕분에 외국인에게 길을 물을 때는 노트에 미리 써 놓은 지명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면서 즉시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누나들이 불안해 했던 것과 달리 트램 매표소의 위치도 미리 공부해 놓은 덕분에 전혀 헤매지 않고 곧바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별 것 아닌 듯해도 배낭여행을 해 본 사람은 안다. 하늘과 땅과 물이 모두 낯선 그 곳에서 한 발짝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얼마나 많은 공부와 준비가 필요한지를, 그러고도 실제 상황이 닥치면 얼마나 당황하게 되는지를 말이다. 출발 전에 미리 공부해 두지 못한 것은 바쁜 스케줄 탓도 있겠지만, 설마 이럴 줄은 몰랐던 탓이 더 클 것이다. 이제껏 그런 일들은 항상 매니저가 알아서 해 주었으니까,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타인을 인도하는 가이드 역할은 생전 처음이니까, 이스탄불 공항에서는 누님들이 모두 각자의 짐을 챙겨서 내리신 후에 꼴찌로 내렸을 만큼, 자신의 새로운 역할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던 그였으니까, 이 여행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닫는 데는 실전에서의 혹독한 실패와 고통이 필요했던 것이다.

 

 

터키 공항에서 이동 수단을 찾기 위해 한 시간 반 동안 혼자 막막하게 뛰어다닐 때, 이스탄불의 낯선 거리에서 누나들을 인도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을 때,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만큼 벅차고 힘들었을 때, 이를 악물고 다짐했을 이승기의 땀과 노력이 그 노트 안에 빼곡히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터키에 머물다가 크로아티아로 이동하기까지는 대략 48시간을 넘지 않았을 듯한데, 그 짧은 동안 누나들과 함께 밥 먹고 돌아다니고 촬영하면서 틈틈이 쉬는 시간과 잠 자는 시간을 아껴 공부하고 또 공부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기특하면서도 안스러운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완벽한 듯 하지만 의외로 허당이고, 허당인가 싶으면 성실과 노력으로 빈 곳을 채워넣는 이 귀여운 청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포스팅의 주된 내용은 이승기의 성실한 노력을 칭찬하는 것이지만,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승기의 노트를 볼 때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처럼, 내 가슴에는 먹먹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그레브의 쌀쌀한 밤 공기 속을 서성이며 6번 트램을 기다릴 때, 이미연이 문득 김희애의 등 뒤로 다가가 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우, 가늘다" 김희애는 살짝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니? 안 춥니?" 똑같이 어린 나이에 데뷔하여 쉽지 않은 여배우의 길을 선택하고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그들은 이 여행 전까지 서로를 잘 알지 못한 듯했다. 비로소 한 뼘쯤 더 알게 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은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성격이 강하고 와일드해 보이지만 사실은 여리고 눈물 많은 이미연을, 김희애는 차분한 언니답게 안아주고 싶은 것 같았다.

 

이미연 역시 너무 완벽해서 깍쟁이일 줄만 알았던 김희애의 소탈한 모습을 보며 새삼 깊은 정을 느끼게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이미연이 하는 말은 상당히 독특했다. "저는 김희애라는 사람이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겟어요.." 대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 밑도 끝도 없이 김희애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를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이미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이어서 말했다. "그냥 여배우로서... 잘 살아 줘야죠, 몇 명은..." 아, 그거였던가? 자신은 여배우로서 잘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라도, 다른 몇 명이라도 잘 살아 줬으면, 그래서 대중에게 자랑스런 여배우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가?

 

 

누구의 인생에나 우여곡절은 있게 마련인데, 자신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그저 티없이 자랑스럽기만 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오히려 그런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게 비틀린 자만심은 아닌지 숙고해 봐야 할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아주 단편적이고 객관적인 사실 외에는, 그녀의 삶에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자극적 이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멋대로 입방아 찧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처럼 강해 보이는 그녀인데, 사실은 모든 오해와 질시들이 크고 작은 상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걸까? "그냥 여배우로서... 잘 살아 줘야죠, 몇 명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지만, 내 가슴은 이상하게 쓰라렸다. 하지만 눈물을 쏟으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그냥 꾹 눌러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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