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기황후' 잘못 끼운 첫 단추가 못내 아쉬운 수작(秀作) 본문

드라마를 보다

'기황후' 잘못 끼운 첫 단추가 못내 아쉬운 수작(秀作)

빛무리~ 2013. 11. 27. 07:30
반응형

 

요즈음 나는 공포스럽도록 지독한 '드한기'에 허덕이고 있는 중이다. '드한기'가 무엇의 줄임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뜻은 '도통 볼만한 드라마가 없어서 지루한 시기'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평소 드라마 시청을 즐길 뿐 아니라 리뷰를 쓰는 활동을 통해서도 일상의 활력을 충전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힘든 시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각종 드라마는 여러 방송국에서 차고 넘치게 방송되고 있으며 새로운 작품들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어째서 당최 볼만한 것이 이토록 없는 것일까? 

 

 

'너의 목소리가 들려'와 '황금의 제국'이 방송되던 6월부터 9월까지는 정말 행복했었다. 그 두 작품 외에도 썩 괜찮다 싶은 드라마가 초가을 까지는 제법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후부터는 거의 전멸 수준이다. 케이블에서 방송되는 '감자별 2013QR3'과 '응답하라 1994' 덕분에 간신히 숨통은 붙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드라마에 대한 갈증을 충분히 풀 수 없었다. '감자별'은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차별성이 있고, '응답하라 1994'는 예능 작가와 PD가 만든 드라마라선지 아주 독특한 매력이 있는데, 둘 다 재미는 있지만 정통 드라마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평일 오후 10시경에 방송되는 드라마들의 한결같은 부진이다. 원래 그 시간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드라마의 황금 시간대라고 볼 수 있지만, 요즘 같아서는 차라리 TV를 끄고 싶어질 지경이다. 얼마 전까지 '비밀'과 '상속자들'이 경쟁을 벌였던 수목드라마의 양상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월화드라마는 현재도 답이 없을 뿐 아니라 후속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 보아도 그저 한숨만 나온다. '수상한 가정부' 후속으로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미래의 선택' 후속으로는 '총리와 나'가 방송될 예정인데, 뚜껑도 열기 전에 김 새는 소리는 좀 그렇지만 대략의 컨셉과 얼개를 보면 끌리는 마음이 좀처럼 생기질 않는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는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의 향기가, '총리와 나'에서는 유치한 로코물의 향기가 풍긴다.

 

 

솔직히 내 취향을 따진다면 역사 왜곡 논란으로 시끄러운 '기황후'가 잘 맞는 편이다. 나는 사극을 좋아하고, 유치한 웃음보다는 묵직한 비장미를 선호한다. 장영철 · 정경순 작가의 탄탄한 스토리 구성 능력은 그간의 작품 활동으로 충분히 증명되었고,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부은 만큼 화려한 볼거리도 가득하다. 특히 이것은 피 맺힌 역사 속을 치열하게 살다 간 여성들의 이야기이니, 열정과 비련이 어우러져 짙은 페이소스를 자아낼 것이다. 출발이 좋았더라면 '선덕여왕'의 미실과 덕만에게 빙의하여 울고 웃던 4년 전의 꿈 같은 시간을 재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면 좋으랴,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생각할수록 아쉽고 애통하다.

 

나는 사극을 시청할 때 '고증' 부분을 크게 중요시하지는 않는 편이다. 출연자들의 복색이나 머리 모양 등이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아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스토리 면에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들이 조금씩 튀어나와도 뭐 그럴 수 있겠거니 했다. 어차피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라 픽션이니까, 최소한의 지킬 것만 지킨다면 세세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황후'는 그 최소한의 지킬 것을 무너뜨린 경우에 해당했다. 단역이나 조연도 아니고 주인공의 정체성이 걸린 문제인데, 이것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기황후'는 엄연한 실존 인물이고, 그녀의 행적은 서슬 퍼런 역사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의 제목부터가 '기황후'인데, 주인공은 역사 속의 그 '기황후'가 아니라 가상의 인물 '기승냥' 이라고 백 번 주장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모국인 고려의 조정을 억압한 기황후... 희대의 난봉꾼이자 폭군으로서 역사에 치욕적인 이름을 남긴 충혜왕... 작가는 어쩌자고 이 두 사람의 일생을 미화시켜 주인공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논란이 거세어지자 충혜왕 캐릭터는 '왕유'라는 가상의 인물로 대체되었지만, 어차피 주인공이 '기황후'라면 그것도 별 의미가 없다. 하지원이 연기하고 있는 주인공 기승냥은 그 당시 여성으로서 입지전적인 영웅의 삶을 살아냈을 뿐 아니라, 고려 임금 왕유에 대한 애달픈 사랑을 가슴에 품은 채 가혹한 운명의 장난으로 원나라 황제의 품에 안겨야만 했던 비련의 여인이다. 이것은 역사에 기록된 기황후의 모습과 너무도 다르니, 아는 사람은 알아서 불편하고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오해하게 된다. 더구나 이 드라마가 외국으로 수출된다면, 그 영향과 파장을 가벼이 여길 수 있을까?

 

사극의 고증에 크게 신경쓰지 않던 나로서도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월화요일에 볼만한 드라마가 없었다. 가장 끌리는 작품은 '기황후'였고, 주인공의 정체성이 찜찜하다는 그 한 가지를 빼면 모든 면에서 내 취향에 꼭 맞는 매혹적인 향기가 풍겼다. 나는 고민했다. '기황후'를 보고 싶은데, 거북한 마음으로 시청하기보다는 맘 편히 보고 싶어서 '글로벌' 어쩌고 하는 제작진의 변명에도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대충 수용할 수 있어도,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공녀로 끌려간 것은 힘 없는 조국 고려로부터 버림받은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니 과연 그 마음속에 무슨 애국심이 남아 있겠는가, 하면서 기황후의 입장을 옹호하는 일각의 의견에도 주목해 보았다. 제법 설득력은 있지만 역시 수긍하긴 어려웠다. 한국인 특유의 감정이 얼마나 고집스런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고민하며 어영부영하다가 초반은 놓쳤다. 재미있게 몰입하면서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찜찜하고 거북하니 안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월화요일에는 진짜 해도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볼 게 없었고, 따분함에 몸서리치던 중 백진희의 악녀 변신이 화제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아, 백진희... '하이킥3'와 '금 나와라 뚝딱'에서 유독 가냘픈 자태로 애상을 자아내던 그 소녀가 악역을 맡았다고? 어찌나 하얗고 여리여리한지, 웃는 얼굴은 또 어찌나 순해 보이는지, 밝게 웃고 있어도 마냥 애잔해 보이던 그녀가 악역을 제법 멋지게 소화하고 있다는 뉴스를 읽으니 못 견디게 궁금해졌고...

 

 

에라 모르겠다, 나는 비로소 '기황후'를 보기 시작했다. 밀린 방송분을 모두 챙겨보고 나니, 과연 내 취향에 썩 잘 맞는 드라마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인물들도 잘 빠졌다. 백진희의 악녀 연기는 상큼하도록 신선했고, 하지원의 열연은 실망을 주지 않았으며, 주진모와 지창욱도 자신의 캐릭터를 훌륭히 살려냈다.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김서형과 진이한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 '기황후'를 시청하게 될 듯 싶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거북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기에, 맘 편히 몰입하지는 못할 것이다. 문득 2000년에 발간되었던 김지혜 작가의 소설 '공녀'가 떠올랐다. 그 책 속에도 기황후가 등장했지만, 주인공은 기황후가 아니라 또 다른 공녀였다. 주인공의 이름은 '최예영'이고 그 친구의 이름은 '기금옥'이다. 두 소녀는 귀족의 딸이었음에도 공녀로 차출되어 원나라까지 끌려왔는데, 슬픔과 공포에 질려서 어쩔 줄 모르는 예영과 달리, 금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차분한 자세로 현실을 마주한다. 알고 보니 금옥은 스스로 야심을 품고 공녀가 된 것이었으며, 예영은 그 오빠들이 비뚤어진 야심으로 여동생을 팔아넘긴 경우였다. 미모의 여동생이 원나라 황제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게 되면, 자기들은 고려 조정에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될 거라고 오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성이 예민하고 약한 데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 온 예영이 오빠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리는 만무했다. 반면 자신의 의지로 그 길을 선택한 금옥은 적극적인 자세와 대담한 유혹으로 삽시간에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가 바로 훗날의 기황후다. 공녀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던 예영은 번번이 황실의 친군대장 샤하이에게 가로막히는데, 그 과정 속에서 샤하이는 예영을 사랑하게 된다. 샤하이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예영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고,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던 예영도 결국은 샤하이의 뜨거운 진심에 감복하여 그를 받아들인다. 로맨스 소설치고는 꽤나 흥미진진하고 퀄리티도 높아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책이다. 만약 드라마 '기황후'에도 이 소설의 기본 공식을 적용했다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주인공이 기황후가 아니라 다른 공녀였다면, 같은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거부감은 없었을 것이다. 강인하고 용감하고 열정적인 기승냥의 성품은 주인공에 적합하지만, 그녀는 기황후가 아니라 다른 가상의 여인이어야 했다는 말이다. 냉혹한 야심으로 가득찬 기황후와 달리, 여주인공은 따뜻한 인간애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어야 할 것이다. 황제의 총애를 입고 권력을 잡은 기황후가 고려를 압박할 때, 여주인공은 안타까운 눈물로 만류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황실의 종친이나 고위 관리의 아내 정도는 되어야겠지. 하지만 가슴 속에는 여전히 고려 임금 왕유에 대한 사랑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설정했다면, 역사에 기록된 기황후의 이미지를 억지로 바꿔 놓지 않아도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차이점은 있다. 황후의 자리에 오른 기승냥의 일대기는 슬픈 멜로가 섞여 있어도 결국은 통쾌한 성공담이지만, 기황후가 아닌 다른 공녀가 주인공이 된다면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이 드라마는 비극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 떠나온 조국... 평생을 그리움에 시달리며 이국의 황실에 갇혀 살다가 쓸쓸히 떠나간 여인... 기황후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보상받을 수도 없었던, 상상만 해도 지독히 처연한 삶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를 더욱 깊이 되새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수많은 공녀들 중 유일무이한 승리자로 기록된 기황후보다, 어쩌면 평범하고 이름없는 공녀들을 대표할 수 있는 캐릭터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는 더 적합했을 것 같다. 물론 이제 와서는 다 소용 없는 이야기지만.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