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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나와라 뚝딱' 작가의 못 말리는 '용서-화해' 강박증 본문

드라마를 보다

'금 나와라 뚝딱' 작가의 못 말리는 '용서-화해' 강박증

빛무리~ 2013. 9. 2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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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초중반의 스토리 전개가 괜찮아서 나름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결말은 실망스럽다. 요즘 같아서는 수십 년 전의 그 촌스러웠던 '전설의 고향'을 다시 보고 싶어질 지경이다. 너무나 뚜렷해서 소름끼칠 정도였던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그리워진다는 뜻이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들은 '용서' 또는 '화해'라는 단어에 강박증이 걸려 있는 듯하다. 용서나 화해의 메시지에 대중적 공감을 얻으려면 악역을 적당히 나쁜 놈으로 설정해야 하는데, 문제는 너무 지나치게 악마같은 놈으로 설정해 놓고서 결국은 피해자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용서하게 만들고, 어쨌든 용서하고 화해하니 모두가 행복해졌다면서 다같이 하하하 웃고 끝나게 만드는 것이다. 참 가소롭기 이를 데 없다. 감히 말하건대, 그런 용서나 화해보다는 명명백백한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훨씬 더 세련되고 예술적이다.

 

그 놈의 용서 강박증 때문에 제대로 피맛 본 케이스가 바로 '적도의 남자'였다. 엄태웅이 누구던가? 복수극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부활'의 남주인공으로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깊은 인상을 남겼고, 후속작 '마왕'에서는 반대로 복수를 당하는 쪽의 역할을 맡아 역시 레전드다운 연기를 보여 주었던 배우다. 따라서 엄태웅 주연의 복수극이라는 자체만으로도 무척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김인영 작가는 '용서'라는 화두에 꽂힌 나머지 제대로 된 복수극을 만들지 못했다. 명색이 복수극이면 일단 복수를 하고 나서 후회도 하고 용서도 해야 할 텐데, 주인공 김선우는 열심히 복수 준비를 해서 짠~하고 나타나기는 했지만, 상대방에 대한 연민과 용서에 대한 강박증 때문에 정작 복수는 시작도 못 하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시청자로서는 그보다 더 답답하고 속터지고 어이없는 꼴이 있었을까?

 

 

서양의 고전이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도 내가 최고로 치는 작품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다. 진정한 복수극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대형 백과사전 2~3권 두께의 방대한 분량이지만, 학창 시절 나는 책장이 너무 빨리 넘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읽었더랬다. 이 재미있는 책을 너무 빨리 읽어 치우고 싶지 않은데, 도저히 다음 장을 읽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가 원수들에게 차례로 복수해 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심장이 쫄깃해질 만큼 역동적이었고, 준비 과정이 철저했던 만큼 원수의 몰락도 완벽했고, 독자로서 주인공에게 빙의되어 만끽하는 복수의 쾌감은 매번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중에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모든 복수를 끝내고 허무함과 죄책감에 무너지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독자들로 하여금 복수의 쾌감을 충분히 느끼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진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기막힌 스킬이었다.

 

그렇다.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 모든 복수극의 주제는 '복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복수극을 감상한 후에는 "복수란 정말 허망하고 의미없는 것이구나. 아무리 힘들어도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 감싸 안으며 살아가는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 최선이겠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억지로 주입시킨다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짜 좋은 예술작품만이 일깨울 수 있는 진한 감동이며 양심의 발현이다. 그런데 요즘 수많은 작가들은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자기 입으로 줄줄 읊어대면서 강제로 주입시키려 한다. 심지어 '마왕'과 '부활'을 통해 복수극의 정석을 보여주었던 김지우 작가마저도 어느 덧 그 시류에 물들어 버린 모양이다. 오랫동안 준비한 복수극 3탄이라며 최근 선보인 '상어'는 그 놈의 용서 강박증 때문에 망치고 말았다. 여주인공을 원수의 손녀로 설정한 것부터가 패착이었을 수도 있겠다.

 

복수하고 싶지만 용서해야 한다는, 쉽지 않은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들의 내면을 그려내고 싶은 욕심이야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용 빼는 재주가 있어도 그 깊은 고뇌를 멋지고 세련되게 표현할 방법이 있나? 기껏 해봤자 머리를 쥐어뜯거나 술을 마셔대는 것뿐, 요즘은 드라마에서는 담배 피우는 장면도 내보내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그럼 대사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누군가에게 매번 일일이 털어놓으면 입 싼 놈이 되고, 혼잣말을 계속하면 미친 놈이 된다. 독백이나 방백도 적당히 써야 하는 거다. 결국 작가의 머릿속에서 주인공은 제법 품격있는 고뇌를 하고 있지만, 시청자 입장에서 볼 때 주인공은 그저 답답한 찌질이일 뿐이다. 신나게 빵빵 터지는 복수의 쾌감을 기다리고 있는데, 주인공은 우거지 죽상을 해가지고 용서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에만 빠져 있다. 아, 정말 답답하다. 그러더니 제대로 복수는 하지도 못한 채, 결국은 다 용서하고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단다. 그래, 나는 안 볼 테니 너희들끼리 실컷 행복해라.

 

 

설령 출발은 복수극이 아니었다 해도, 작품 속 악역들이 점점 더 악행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는 은연중에 주인공의 복수를 기대하게 된다. 여기서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제대로 복수해 주는 것인데, 요즘 작가들은 이 방법을 굉장히 촌스럽게 여기는 듯하다. 구시대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온고지신이라, 오래된 것에서 배울 줄 알아야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도 있는 법이거늘... 하지만 최근 드라마 중 용케도 강박증을 벗어나 괜찮은 엔딩을 맞이한 작품이 있기는 했더란다. 머리를 몽키스패너로 내려치고 불을 질러서 자기 엄마를 죽인 놈을 용서한답시고 설치면 어떡하나... 그 잘난 척을 어찌 봐주나 걱정했는데, 더 이상 얼굴 안 보고 생각도 안 하고 잊어주는 걸로 끝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최후의 함정을 피함으로써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이제 최종회만을 남겨두고 있는 '금 나와라 뚝딱'의 뻔한 결말이 실망스러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어째서 피해자들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어야 하는 걸까? 진숙(이경진)이라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에겐 사랑하는 남편 박순상(한진희)와 어린 아들 박현수(연정훈)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의 내연녀 둘이 공모해서, 진숙이 황종팔이라는 알지도 못하는 사내와 바람을 피웠다는 누명을 씌웠고, 그녀들의 술수에 속아 넘어간 박순상은 진숙을 내쫓았다. 진숙이 쫓겨난 자리에는 좀 더 똑똑한 첩 장덕희(이혜숙)가 들어와 앉았고, 좀 멍청한 첩 민영애(금보라)는 딴 집 살림을 하면서 제 아들 박현태(박서준)를 키웠다.

 

장덕희는 자기 아들 박현준(이태성)을 박순상의 후계자로 만들어 회사를 물려받게 할 욕심에, 어린 박현수를 모질게 구박했다. 본처의 자식이며 박순상의 장남이니 경계대상 1호였고, 구박의 강도는 막내 현태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현수는 계모 장덕희 슬하에서 온갖 인격적인 모욕과 학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네 친엄마는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워서 쫓겨났다고 장덕희가 말했기 때문에, 사춘기의 예민한 소년은 친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을 뿐,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현수의 생모이자 박순상의 본처였던 진숙은 억울하게 쫓겨났지만 너무 약하고 순진해서 자기를 변호할 줄 몰랐고,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히려 아들 현수에게 피해가 될까봐 그저 숨 죽인 채 24년을 살아왔다. 재벌가 사모님이었던 그녀가 길에서 만두와 찐빵을 팔면서 말이다.

 

 

24년 후에야 진실을 알게 된 아들 현수가 친엄마를 찾아왔다. 장덕희가 그래도 아들만은 잘 키워 주었다고 생각하며 고마워하던 진숙은, 얼마 못 가 민영애의 입을 통해 현수가 얼마나 혹독한 구박과 학대 속에 자랐는지를 알게 된다. 자, 어떤가? 장덕희를 향한 진숙과 현수 모자의 원한이 가벼울까? 박현수는 자기 친엄마에게 누명을 씌워 내쫓아 24년이나 고통 속에 살게 한 장덕희를 용서할 수 없고, 진숙은 너무 어렸던 자기 아들을 혹독하게 구박하며 키워 온 장덕희를 용서할 수 없는 게, 그게 당연한 인지상정 아닐까? 자기한테 행한 잘못은 용서할 수 있어도,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행한 잘못은 용서할 수 없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데 진숙과 현수는 너무 쉽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장덕희를 용서했다. 그냥 두 사람이 착해서 그런 것뿐,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짜증난다. 장덕희는 끝까지 포악을 떨며 박현수와 동반자살을 계획하는데, 엄마를 안 닮아서 착한 아들 박현준이 사고를 막으려다가 대신 중상을 입었다. 차라리 그대로 죽었더라면 장덕희에게 천벌이라도 내려졌다 싶었겠는데, 현준은 멀쩡히 살아나고 장덕희는 그 사건으로 개과천선한다. 아들이 살아나자마자 다시 본성을 되찾고 포악을 떨 수도 있는데, 마치 다른 사람처럼 온순하게 변한 것은 용서와 화해와 해피엔딩을 위한 통과의례였다. 아, 역겹도록 인위적이다.


 

용서를 주제로 삼아 가장 깊은 화두를 던진 문학작품으로는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주인공 요오코의 양아버지이며 초반의 주인공 역할을 담당했던 게이조오는 선박 난파 사고로 죽음의 고비를 겪었지만 다행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게이조오에게 어떤 친구가 말한다.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예전과 달리 살겠다고 욕심은 부리지 말게. 어차피 사람은 자기 그릇대로 사는 법이고, 예전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내용을 어렴풋이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것이라 표현에서는 틀린 부분도 있겠지만, 핵심 내용은 정확하다. 사람은 절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죽음의 고비를 넘겼더라도.

 

그런데 '용서'라는 주제를 입으로 떠들고 싶어하는 작가의 드라마에서, 악역들은 너무도 쉽게 변한다. 너무 쉽게 개과천선하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어도 포기하고, 언제 포악한 악마였냐는 듯 온순한 얼굴의 천사가 되어 버린다. 그런 식으로 피해자를 압박(?)해서 어쩔 수 없이 용서하게 만들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과연 훈훈한가?

 

 

사실 나는 굉장히 심약한 편이라서 한 번 깊이 상처받으면 아무리 잊으려 해도 쉽게 잊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별로 큰 일이 아닌데도,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되었으면 10년이 지나도 생생히 다시 떠오르며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절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님..;;)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용서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드라마 속 일이지만, 사람을 죽여도 눈물 한 번 보이면 쉽게 용서받고, 24년이나 누명을 씌우고 어린 자식을 구박하며 키워도 무릎 한 번 꿇으면 즉시 용서받는, 그런 식의 모습들은 정말 거북하다. 왜 요즘 작가들은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서 피해자를 두 번 죽이나? 본인들이 피해자 입장에 처한다면, 정말 그토록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늦게나마 작가로 데뷔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복수극 한 편을 쓰고 싶다. 그 작품 속에는 절대 용서 강박증에 걸린 사람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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