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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상' 인간의 욕망, 그 허무함을 말하다 본문

책과 영화와 연극

영화 '관상' 인간의 욕망, 그 허무함을 말하다

빛무리~ 2013. 9. 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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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중 하나이다. 사주나 타로 등의 점술이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흥행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1990년에 발표된 영화 '백 투더 퓨처2'의 내용을 기억하시는가? 30년 후의 미래로 시간 여행을 갔던 주인공 '마티'는 과거 50년 동안의 스포츠 경기 통계가 담겨 있는 책 한 권을 가져오려다가 '브라운' 박사의 만류로 실패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은 악당 '비프'가 타임머신을 훔쳐타고 더 오래 전의 과거로 달려가 그 스포츠 연감을 젊은 날의 자기 자신에게 전해주면서 모든 현실은 달라졌다. '비프'는 단지 스포츠 경기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서 그 힘을 마음껏 휘두른 '비프'의 악행으로 인해 '마티'의 아버지인 '조지'가 살해당하는 등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이처럼 커다란 혜택을 의미한다. 미래를 안다면 닥쳐올 불행을 피할 수 있으니 모든 두려움과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것이고, 반대로 자신에게 다가올 행운은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비프'처럼 그것을 악용하여 부당한 재물과 권력을 취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평범한 인간의 자제력이란 욕망의 크기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법인데, 과연 우리 앞에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비프'와 달리 행동할 거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예상컨대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현실 속에서 시간 여행이란 불가능할 것이고, 어쩌면 그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한재림 감독의 영화 '관상'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욕망에서 출발한다. 관상을 보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알 수 있다니, 그 얼마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인가? 사실(史實)과 허구가 결합된 이 팩션(faction) 사극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조선 초기 역사에 기술된 실존인물이지만, 주인공 김내경(송강호)을 비롯한 몇몇은 가상의 인물이다. 김내경은 조선 최고의 관상쟁이로서 잠시 스치듯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기질과 품성,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알아맞힐 수 있는 기막힌 능력의 소유자다. 그는 역모 사건에 휘말려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관상학 공부를 좀 했을 뿐이라는데, 어떻게 그런 신통한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의문이다.

 

실존인물로는 조선의 제5대 임금 문종 역에 김태우, 제6대 임금 단종 역에 채상우, 제7대 임금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 역에 이정재, 그리고 문종의 유명을 받아 단종을 보좌하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당한 김종서 역에 백윤식이 등장한다. 병약한 문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는 수양대군의 야심은 파다하게 소문나 있었고, 세상 사람들은 수양대군을 침략자 '이리'에 비유하는 한편, 충신 김종서는 왕권의 수호자 '호랑이'로 비유하면서 그들의 대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 무렵 기생 연홍(김혜수)의 꼬임에 빠져 돈벌이를 위해 한양에 왔던 김내경은 그 특출한 능력 때문에 결국 호랑이와 이리의 싸움에 휘말리고 만다.

 

풍운의 시기였던 만큼,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문종은 어린 아들 단종을 지키기 위해 주변인들의 미래를 알고자 했고, 수양대군과 김종서 역시 자신들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김내경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나름 올곧고 선량한 품성을 지녔던 김내경은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김종서를 도우려 하지만, 신통한 능력을 지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 쉽게 흔들리고, 유혹에 넘어가고, 자의적 오해에 빠지고, 감정적 분노와 격동에 굴복하고, 육체적 고통 앞에 무너지는, 인간 본성의 나약함이었다.

 

 

혹자는 말한다. 관상을 통해 미래를 알고 준비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예정된 비극을 맞이해야만 했던 결말이 불편하다고, 그런 엔딩은 노력의 가치를 폄하하며 허무한 운명론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 작품이란 다각도의 해석이 가능할수록 더욱 흥미로운 법이니, 그런 차원에서 나는 '관상'이 조금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명작의 반열에 오를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나는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두고 이 영화를 관람했기 때문이다.

 

'관상'의 엔딩은 분명 허무하다. 배우들의 열연에 비해 스토리가 취약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니, 처음부터 반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것은 광폭한 삼촌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수많은 충신을 죽임으로써 권력을 잡는 이야기다. 슬프고 허무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허무한 것이 인간의 삶이나 운명 자체가 아니라 과도한 욕망과 집착이라는 사실이다.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과 (나쁜) 운명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이지만, 도를 넘어 집착하거나 몸부림치면 파멸의 도화선이 된다. 인간의 운명이란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부분도 틀림없이 있을 터, 어쩌면 불행한 운명은 하늘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온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김내경은 분명 김종서를 돕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고 집착이 과도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수양대군을 돕게 되고 말았다. 이처럼 반드시 개인의 영달이나 축재를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지나친 욕망과 집착은 불행을 가져온다.

 

 

이 영화의 설정에 따르면 원래 수양대군은 반역의 상을 타고났으나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는데, 알 수 없는 미래를 지나치게 두려워한 문종과 김종서의 욕심 때문에, 즉 미래를 알고 운명을 바꾸려는 과도한 욕망 때문에 어부지리로 왕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의 욕망이란 얼마나 모순되고도 허망한가! 어차피 미래를 알기는 불가능한 일인데, 정당한 노력으로 앞날을 개척하는 것은 좋으나, 순리에 거슬러 무리한 방법으로 운명을 알고 바꾸려 한다면 타인을 향했던 그 화살은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이 비록 슬프고 허무하지만 그 여운이 오래 가는 것은 이와 같은 교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송강호와 김혜수의 원숙한 연기는 명불허전이었고, 김내경의 처남 팽헌 역을 맡은 조정석의 연기는 오월의 꽃처럼 만개했다. 무관보다 문관의 느낌이 강했던 백윤식은 김종서 장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해 주었고, 김내경의 아들 진형 역을 맡은 이종석의 연기는 사극이 처음이라선지 설익은 풋복숭아 같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강 악역으로 훌륭히 변신한 이정재는 이 작품을 통해 연기 인생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을 듯 싶다. 후반에는 비극적이고 장중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지만, 초반에는 가벼운 풍자와 해학이 조정석의 물 오른 연기와 멋지게 어울리며 유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관상' 이쯤이면 올 하반기의 기대작으로서 부끄럽지 않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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