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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여신 정이' 진지희, 그 천재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본문

드라마를 보다

'불의 여신 정이' 진지희, 그 천재성의 근원은 무엇일까?

빛무리~ 2013. 7. 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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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권순규 작가의 전작이 '무사 백동수'라고 해서, 처음부터 아예 볼 생각이 없었던 드라마입니다. 초반에는 상당히 흥미진진했으나 가면 갈수록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던 '무사 백동수'의 그 황망한 전개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까닭이죠. 전광렬 최민수 등 중견배우들의 묵직한 연기와 국민남동생 유승호의 매력적인 다크포스로도 감당할 수 없었던, 점차 산으로 가는 대본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신뢰를 갖게 할만한 다른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필모그래피가 (드라마로는) 달랑 그 '무사 백동수' 하나뿐이니, 동시간대에 다른 채널에서 '추적자 THE CHASER'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박경수 작가의 신작 '황금의 제국'이 방송되는 이상 '불의 여신 정이' 쪽으로 시선을 돌릴 이유는 없겠다 싶었어요.

 

두 개의 드라마가 1~4회까지 방송된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일단 '불여정'이 초반 기선제압에 성공한 듯 보이지만, 7~8회쯤 되면 이 추세가 분명 뒤집혀 '황제'가 승승장구하게 될 거라고 저는 확신에 가까운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박경수 작가는 한국 드라마 작가들 중 참으로 보기 드물게 강한 뒷심을 갖고 있는 반면, 권순규 작가는 초반에 강하지만 중간부터 호흡이 벅찰 정도로 뒷심이 아주 약한 스타일이거든요. '백동수'도 아역들이 등장하던 초반에는 명작의 가능성마저 풍긴다 할 정도로 괜찮았지만, 성인배우들이 등장한 후로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 급속도로 망작이 되어갔습니다. 작품 하나만으로 이런 판단을 내리는 건 성급하다 (혹은 부당하다) 여기시나요? 배우들은 데뷔 초에 발연기를 하다가도 작품을 거듭하며 연기가 늘게 되지만, 작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 창작은 타고난 재능이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발전하기 어렵거든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썩 괜찮은 데뷔작을 발표했다가도 제대로 된 후속작을 써내지 못해 묻혀버린 작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박경수 작가의 '황금의 제국'도 이미 '추적자'에 비해서는 한풀 꺾인 느낌으로 전작만은 못하다는 평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을 만큼 보통의 작가들은 처녀작이 가장 훌륭한데, 첫 작품이 망작이었다면 그 후속작이 성공할 가능성은 솔직히 10% 미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게다가 아역 진지희가 여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너무 훌륭히 소화하고 있는 것도, 머지않아 바통을 이어받을 문근영에게는 호재보다 악재가 될 듯 싶네요. 배우가 아무리 노력해도 극본이 받쳐주지 못하면 한계가 있을테니, 뒷심 잃은 후반을 연기해야 할 문근영은 초반의 진지희와 자꾸 비교되면서 평가절하될 가능성이 높아요.

 

어쨌든 볼 생각이 없었던 드라마인데, 아역 진지희를 향한 칭찬이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쏟아지는 것을 보니, 도대체 어떻게 연기하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뻔한 내용이지만 재미있다는 평판도 들려왔고요. 그래서 뒤늦게 보았는데, 권작가는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초반부터 내용 설정이 빈약하니 차후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가 그 빈약함을 잘 포장해 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야말로 진부하고 뻔한 클리셰의 집합이었죠. 주인공이 사실은 원수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 타고난 천재를 질투하는 노력형 수재의 악행들, 그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들과 우연으로 점철된 러브라인의 시작... 등 새로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더군요. 

 

게다가 주요 에피소드와 갈등이 풀려가는 과정도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해 무척 어설펐습니다. 아무리 태조 대왕의 유품(?)이라고는 하지만 그릇 하나를 실수로 깨뜨린 것이 대역죄라는 설정도 황당했고, 더욱이 깨진 그릇을 말끔히 복원한 사람마저 대역죄랍시고 핏대를 세우는 임금과 대신들의 태도는 정말 우습더군요. 허우대는 멀쩡한 사람들이 정신 나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어린 평민 여자아이가 신문고를 울렸다 하여 임금이 직접 그 아이를 접견하며 하소연을 둘어주는 것도 어색했고, 하마터면 두 사람의 목숨이 날아갈 뻔했던 중대 범죄가, 어린아이의 세 치 혀에 홀랑 넘어간 임금의 자유재량으로 선뜻 풀어줄 수 있을 만큼 가볍고 쉬운 일처럼 변해 버린 것도 우스웠습니다.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모두들 난리쳤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린 꼴 아닙니까? 아무리 왕정 체제라지만 그렇게까지 원칙이 없었을까요?

 

 

하지만 정보석, 이종원, 전광렬, 변희봉 등 중·노년 배우들의 묵직한 연기와 진지희, 박건태, 노영학, 김지민, 오승윤 등 아역들의 신선한 연기가 부족한 대본으로 인해 한없이 오그라들려는 손발을 풀어주고 있었습니다. 선배들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아역들의 활약이 눈부시더군요. 여주인공 정이 역의 진지희는 과연 명품 아역의 진면목을 과시했고, 모짜르트같은 정이의 천재성과 맞서며 그녀의 라이벌이 될 여자 살리에르 화령 역의 김지민은 어린 소녀임에도 놀라울 만큼 단아한 자태를 뽐내며 수준급의 감정 표현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만찮은 경력을 자랑하는 남자 아역들은 연기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성인 배우들과의 싱크로율이 끝내주더군요. 광해군 역의 노영학과 이상윤, 김태도 역의 박건태와 김범, 그리고 이육도 역의 오승윤과 박건형... 모두들 신기하게 닮았어요. 다만 중학생이 되면서 한껏 성숙하고 여성스러워진 진지희의 바통을 이어받아야 할 문근영이 별로 닮지 않은 데다가 왜소한 체격에 남장을 하고 소년처럼 등장할 것은 좀 염려스럽더랍니다.

 

그런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정이의 천재성을 보고 있자니, 과연 저 아이는 누구를 닮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깨진 도자기 복원에 접착제로 흔히 쓰이는 계자백(달걀 흰자)을 대신하여 지렁이 진액을 생각해내는 창의력과, 마땅한 흙재료가 없으면 이것 저것 섞어서 만들어 내는 천부적 감각에, 스승을 따라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를 스스로 개척하는 번뜩임은 분명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만약 키워준 아버지 유을담(이종원)의 친딸이었다면, 정이의 능력은 쉽게 설명이 됩니다. 살리에르 이강천(전광렬)의 극심한 견제를 받아 숨죽이고 살아가는 을담 역시 불운한 모짜르트니까요. 하지만 정이는 천재 유을담의 자식이 아니라 오히려 재능없는 이강천의 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1회에 잠시 등장했다가 속절없이 죽어간 정이의 생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사기장을 꿈꾸던 연옥(최지나)은 천재 유을담이 인정할 만큼 훌륭한 재능을 지녔으나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꿈을 이룰 수 없었죠. 연옥은 을담을 목숨처럼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어느 날 이강천에게 짓밟혀 임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강천의 행동은 연옥을 향한 사랑이나 욕정이 아니라 을담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분원 낭청 경합에서 을담을 이기고 싶었던 강천은 연옥을 속여 을담이 사용하는 유약에 복사꽃을 넣게 했는데, 이는 선조(정보석)의 총애를 받는 공빈에게 복사꽃 담마진(알레르기)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죠. 을담이 올린 찻잔으로 차를 마시고 공빈이 기절하자 선조(정보석)는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며 을담을 옥에 가두는데,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연옥은 비밀을 폭로하겠다며 강천을 협박하여 을담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합니다.

 

 

그러자 비정한 이강천은 자객을 보내 연옥을 죽이려 했는데, 자객이 강천의 충복임을 알아본 연옥은 자기 태중에 강천의 핏줄이 있다는 고백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간신히 탈출해 도자기를 굽는 가마에서 홀로 정이를 낳았습니다. 한편 공빈이 둘째아들 광해군을 출산하자 기분이 좋아진 선조는 죄인들을 석방하라 명하고, 무사히 풀려나온 을담은 동화같은 우연으로 가마에 몸을 숨긴 연옥을 만나게 되었군요. 그런데 또 갑작스런 우연으로 가마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연옥은 아이를 꼭 잘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기며 을담과 아이를 밀어냈고, 곧 무너져 내린 가마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이강천의 친딸은 유을담의 양녀가 되어 천방지축 말괄량이로 자라났는데, 그 천부적 재능은 양부의 가르침으로 습득한 게 아니니 마땅히 친부모에게 물려받았겠죠?

 

하지만 생부 이강천은 불같은 야망만 지녔을 뿐 타고난 재능은 그저 평범한 수준이었으니, 정이는 일찍 세상을 떠난 생모 연옥을 닮았겠군요. 유을담을 능가할 만큼 번뜩이는 재능을 지녔으나, 여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꿈을 이루기는 커녕 박정한 남자에게 짓밟히고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던 연옥의 삶을 생각하니, 그 서글픈 운명에 문득 숙연해지더랍니다.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비극적 인생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어요. 하긴 그 시대에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꽃피워 볼 기회마저 박탈당한 여성이 어디 한둘이었을까요? 그나마 허초희라는 이름 석자와 몇 편의 시라도 남길 수 있었던 난설헌은 오히려 행복한 경우일지도 모르죠. 이렇게 생각하니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고 엄마와 똑같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엄마의 불행한 인생을 따르지 않고 씩씩하게 운명을 개척해 나갈 정이의 일대기를 갑자기 응원하고 싶어졌습니다. 앞으로 꾸준히 시청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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