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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최형욱을 집어삼킨 자기합리화의 함정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마의

'마의' 최형욱을 집어삼킨 자기합리화의 함정

빛무리~ 2013. 2. 1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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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손, 신이 내린 영특함, 신이 내린 선량함과 정의로움까지, 주인공 백광현(조승우)은 무결점의 완벽한 인간형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끈질긴 노력은 기본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힘내며 웃게 만들어 주는 활기와 유머감각은 대박 옵션입니다. 이처럼 완벽한 인간 창조와 더불어 아무래도 시대에 맞지 않는 듯한 고난이도의 외과수술 장면이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동안 저는 '마의'라는 작품의 리얼리티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었죠. 다리를 자르거나 머리에 구멍을 뚫는 등의 대수술이라면 현대의학으로도 만만치 않은 것이고, 수술 후에는 양질의 항생제를 다량투여해야 하는 것인데, 아무리 몇몇 문서에 외과술의 기록이 남아있다 해도 그 시절의 의학으로 모두 가능했으리라고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39회를 보면서는,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며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광현의 스승으로 등장하는 사암도인(주진모)은 역사 속 실존인물로서,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발한 침술 즉 '사암침법'으로 유명했다죠. 이 사암침법은 치료 효과가 아주 좋아서 현대 한의학에서도 자주 쓰이는데, 다만 침을 놓을 때의 통증이 심한 편이라 엄살이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썩 환영받지 못한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암침법 중에서 혈맥과 관련된 제반 병증에 쓰이는 '소장정격'이 39회에 등장했군요. 소장정격을 정확히 사용하면 지혈의 효과뿐만 아니라 때로는 수혈의 효과도 볼 수 있으며, 생리불순이나 고혈압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자의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한 후 지혈을 위해 소장정격을 사용하는 백광현의 모습은 매우 실감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드라마를 통틀어 사암침법의 방법이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진 장면이기도 했고요. 손과 발 등에 침을 놓아서 얼굴 부위의 지혈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매우 신비한 의술이지만, 머리에 구멍을 뚫거나 다리를 자르는 등의 장면보다는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리얼리티가 느껴지니 집중할 수 있게 되고, 집중하며 시청하니 각종 복잡한 병증이며 약재며 침술의 이름 등도 적절히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되어,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더군요. 같은 시간에 방송중인 타사의 경쟁작 대본이 등장인물의 전문분야에 있어 전혀 공부하지 않은 흔적을 드러내고 있음과 비교해 볼 때, 작가의 노력은 충분히 칭찬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의'에는 바야흐로 백광현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려는 중입니다. 맨주먹 맨발도 모자라 누명을 쓰고 외국으로 도망쳐야 했던 밑바닥 신세에서, 오직 타고난 천재성과 끝없는 노력만으로 이루어낸 쾌거입니다. 아, 사암도인과 같이 좋은 스승을 만났다는 행운도 포함시켜야겠군요. 청국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은 물론 황비 우희의 부골저까지 성공적으로 치료해내면서 금의환향을 하더니, 이젠 철천지 원수 이명환(손창민)이 고치지 못한 세자의 면종까지도 거뜬히 치료해낼 기세입니다. 새로 등장한 악역 최형욱(윤진호)은, 명의 임언국의 저서 '치종지남' 없이는 절대 백광현이 세자의 주황(패혈증)과 파상풍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단언했지만, 백광현은 책은 커녕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연구해낸 치료법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자에게 패혈증의 전조증상이 나타나자 모처럼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이명환은 최형욱을 내세워 재기를 노리려 하지만, 야속하게도 천재 백광현의 머리에는 독성이 있는 항생제 섬수(두꺼비 기름)를 대신하여 잿가루를 쓰겠다는 아이디어가 또 반짝 떠오르고 말았군요. 드라마 초반에 백광현의 생부 강도준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갖은 악행을 저지르며 승승장구하던 '마의'의 최대 악역 이명환은 후반에 접어들면서 어느 사이엔가 코믹 캐릭터가 되어 버렸는데, 혜성처럼 나타난 최형욱이 그를 대신해서 무시무시한 악역의 포스를 보여줄까 싶더니만 그 역시 백광현의 위세에 기를 못 펴고 제2의 코믹 악역이 되어버릴 모양입니다. 사실 윤진호라는 이 배우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섬뜩한 정통 악역보다는 코믹한 만화적 캐릭터에 가깝거든요.

 

'마의' 39회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최형욱과 옛 스승 사암도인의 만남이었습니다. 씰룩거리는 표정부터 앙칼진 말투까지, 약간 우스울 만큼 전형적인 악역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는 윤진호의 연기가 나름 재미있더군요. 최형욱은 과거 10년 넘게 사암도인을 모시며 그의 비법을 전수받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으나, 의원이 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비뚤어진 최형욱의 심성을 꿰뚫어 본 사암은 그를 내치고 말았습니다.

 

 

왜국(일본)으로 떠났다더니 무슨 목적으로 다시 돌아왔느냐 묻는 사암에게 최형욱은 "당신을 내 앞에 무릎꿇리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더군요. 최형욱이 아무 이유도 없이 백광현을 미워하던 이유는 자기를 내친 스승 사암이 총애하는 제자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유치한 질투와 앙심... 어째 이 드라마의 악역은 모두 소인배에 찌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군요. '선덕여왕'의 미실처럼 매력적인 악역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제가 앞서도 수차례나 지적한 바 있지만, 너무 완벽한 주인공과 너무 찌질한 악역... 이렇게 전형적이고 매력없는 인물 창조는 김이영 작가의 최대 약점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를 내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너는 절대 의원이 되어서는 안 될 놈이었다. 너는 병자가 아니라 의술 자체에 미친 놈이기 때문이다. 너는 의술을 익히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었다. 시체를 수없이 파헤치고 난도질한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산 사람까지 죽이려 했었다!" 스승의 꾸짖음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하던 최형욱은 금세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발악하듯 외쳤습니다. "당신 밑에 있는 그 애송이는 나와 다를 것 같나? 그 놈도 나랑 똑같아. 미치도록 알고 싶다면 그 놈도 결국 나와 같아질 거야. 치종지남... 외과술의 모든 것이 담긴 그 의서 앞에서도 과연 그 놈이 흔들리지 않을까?" 저는 최형욱의 이 대사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놈도 나랑 똑같아. 그 놈도 결국 나와 같아질 거야!" 최형욱의 이러한 자세는 제 주변에서도 수없이 많이 보아 온 '자기합리화의 함정'에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그건 사람을 가장 심각하게 타락시키는 올가미 중 하나이지요. 사소한 잘못부터 심각한 악행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중, 자기합리화의 함정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발을 헛디뎌 그 함정에 빠지는 순간부터는 습관적인 잘못과 악행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다 똑같다" 는 말 자체가 엄청난 매혹과 설득력과 중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똑같다. 너도 마찬가지다' 라고 인식하는 순간, 더 이상 자기 잘못은 죄가 아니라 평범하고 당연한 행위가 되어버립니다. "사람은 다 똑같다!" 세상에 이보다 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이 있을까요?

 

 

하지만 그건 엄청난 모순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다 똑같지 않거든요.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누구도 유혹과 욕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거겠죠. 인간의 3대 욕구라 일컬어지는 식욕, 성욕, 수면욕을 비롯해 권력욕, 재산욕, 명예욕 등등 우리는 갖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욕심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는 당연히 유혹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죠. 사람마다 유혹을 느끼는 분야도 다르고 정도도 다르고 실행에 옮기는 방식도 다른데 어찌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사흘을 굶었다 해서 누구나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부생활에 불만족한 사람이라 해서 누구나 불륜을 저지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백광현은 결코 최형욱과 똑같지 않고 다를 것입니다. 백광현도 최형욱과 마찬가지로 의술에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의술보다 병자에게 더 미쳐 있기 때문입니다. 병자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의술도 포기할 수 있고 자존심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백광현이니까요. 최형욱과 같은 인물로서는 죽어도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것이 진실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똑같지 않고 저마다 다르다는 점, 이것을 인정해야만 개과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사회의 책임도 있겠지만, 개인차를 무시하고 각종 파렴치한 행위와 범죄의 원인을 사회의 문제로만 돌리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저는 때때로 섬뜩함을 느낍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손쉽고 편리하고 완벽한(?) 면죄부는 없거든요. 잘못을 저지르고도 너무나 손쉽게 면죄부를 받을 수 있으니 '사람은 다 똑같다'는 그 말이 얼마나 매혹적이겠습니까? 최형욱 같은 자들은 언제나 '사람은 다 똑같다'고 말하면서,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어디서나 당당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파멸의 지름길에 불과합니다. 이 거지같은 세상에 살다보면 어쩔 수 없다고, 사람은 다 똑같다고, 그러니까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하다 보면, 뉘우침이란 절대 불가능하거든요.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백광현은 최형욱과 달라야만 합니다. 최형욱처럼 자기합리화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백광현은 '사람이 모두 다르다'는 진실을 명백히 깨우쳐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제가 사암도인과 최형욱의 재회를 '마의'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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