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떨리는 가슴-제5화' 그 눈부신 봄날의 외출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떨리는 가슴

'떨리는 가슴-제5화' 그 눈부신 봄날의 외출

빛무리~ 2013. 2. 7. 23:00
반응형

 

 

2005년작 드라마 '떨리는 가슴' 제4화-바람'과 '제5화-외출'은 간단히 말하면 김창완 배종옥 부부의 '일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같은 일탈이라도 그 주제는 확연히 달랐죠. 제4화는 별로 제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에 건너뛰고 제5화의 리뷰를 쓰려 합니다. 4회의 큰 줄거리만 짚고 넘어간다면, 40대의 착하고 소심한 중년 가장 김창완은 어느 날 회사 식당에서 식권을 나눠주는 20대 여직원 오수경(최강희)의 은근한 유혹을 받고 설렘과 떨림을 느끼며 위험한 중독에 빠져들 뻔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 배종옥이 수경을 만나 현명한 대화로써 그녀의 처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수경은 멀리 떠나고 김창완 인생의 한 줄기 바람은 그렇게 추억으로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창완이 엄연히 유부남인 것을 알면서도 "그럼 어때요? 다른 사람 좋아할 수도 있죠. 연애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라고 들이대며 유혹한 오수경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뻔뻔한 년, 나쁜 년에 지나지 않는데 일단 홍진아 작가가 꽤나 귀엽고 순수한 여자처럼 그려놓은 데다가, 최강희 특유의 사랑스런 연기가 더해지면서 이상하게도 호감형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떨리는 가슴' 시리즈 중에서 유일하게 제4화만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죠. 엄연한 불륜을 따스한 봄바람처럼 예쁘게 그려놓았다는 거... 누구나 타성에 젖은 일상을 지내다 보면 새로운 설렘을 그리워하게 되는 거야 당연지사겠지만, 절대 그런 행동을 미화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요.

 

 

이어지는 제5화의 출발 지점에서 배종옥의 내면은 가장 삭막하게 얼어붙어 있습니다. 정작 머리채를 쥐어뜯고 싶었을 오수경에게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언니처럼 다정한 말들로 외로운 아가씨를 토닥이며 떠나 보냈지만, 10여년간의 신뢰를 배신한 남편 김창완에 대한 분노는 하루아침에 사그라들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남편과 아이에게 헌신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어느 덧 중년 아줌마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은 초라하게만 느껴집니다. 눈가의 주름, 허리의 군살, 부부싸움할 때의 그악스런 목소리... 싱그러운 20대의 수경과 비교하면 남편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조차 이해가 될 지경이니 점점 더 서글퍼집니다. 이렇게 종옥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여기서부터 이경희 작가가 표현하는 눈부신 봄날의 외출이 시작되는 거죠.

 

대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김우진(지성). 이 사람의 존재는 시종일관 굉장히 미스테릭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바람처럼 배종옥 앞에 나타나 그녀를 홍대 앞 라이브 카페로 이끌고,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고,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종옥의 수저 위에 반찬을 올려 주는 이 젊은 남자... 그의 정체는 대체 뭘까요? 단정한 배종옥은 왜 김우진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서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고 있을까요? 그의 말 한 마디, 소지품 하나까지, 종옥이 그의 모든 것에 눈빛이 흔들리는 이유는 뭘까요?

 

 

종옥의 여동생 배두나는 우연히 언니의 데이트 현장을 목격하고 어떻게든 말리기 위해 애를 쓰던 중, 우연히 펼쳐 본 오래 된 앨범 속에서 뜻밖에도 김우진과 꼭 닮은 남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의 이름은 김석진. 16년 전에 배종옥과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었죠. 당시 대학생이던 두 사람은 캠퍼스에서 만나 예쁜 사랑을 키워갔고, 어린 소녀였던 배두나는 "석진 오빠" 라고 따르면서 그에게 자전거를 가르쳐달라 조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열혈 운동권이던 석진이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게 되면서 그들의 사랑은 맥없이 스러지고 말았군요.

 

"잘 모르죠? 자기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눈부신 사람인지..." 언제였을까, 그 누구에게서 이런 말을 또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배종옥은 김우진의 다정함에 한없이 빠져드는데, 언니의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 둘 사이에 끼어든 배두나가 외칩니다. 지금 눈앞의 이 바람둥이는 언니가 그리워하는 김석진이 아니라고 말이죠. 그런데 배두나는 아직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걸까요? 분명 자기와는 초면인데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친하게 이름을 부르며 다짜고짜 손을 이끌어 자전거를 가르쳐 주겠다던 이 남자... 분명 탈 줄 모르던 자전거인데 그가 태워주자 마자 능숙히 탈 줄 알게 되었던 신기함까지... 이 신비로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할 법도 한데 배두나, 역시 곰탱이군요.

 

 

동생의 외침을 듣고 꿈에서 깨어난 배종옥은 손수 뜨개질한 목도리를 김우진에게 선물하며 이별을 고합니다. "그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뻤어요. 그 사람을 만난 것처럼 행복했고요, 그 사람을 만난 것처럼 따뜻했어요. 고마웠어요, 우진씨!" 그런데 돌아서는 종옥의 등 뒤에서 우진의 노래가 들려오네요. 16년 전에 김석진이 늘 부르던 노래 '제비꽃' 이었죠. 그 순간 배종옥은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김우진이 바로 김석진이라는 것을.

 

종옥이 체했을 때 김우진이 손을 따 주었던 그 바늘은 오래 전, 툭하면 체하는 석진을 위해 종옥이 직접 만들어 선물했던 휴대용 바늘 케이스에서 꺼낸 거였습니다. 김우진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가리키며 이름을 물었을 때 종옥이 선뜻 '처녀자리'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오래 전 석진이 가르쳐 준 바로 그 별자리였기 때문입니다. (회상 속에서의 어린 종옥은 배두나가, 어린 두나는 고아성이 연기합니다.) "석진아...!" 배종옥이 눈물을 흘리며 김우진을 향해 부르는데... 그 순간 어떤 장례식에 문상을 갔던 배두나는 바로 옆 장례식장에서 김석진의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16년 전, 지명수배에 쫓기던 김석진은 연인 배종옥과 함께 도망치려 했지만, 종옥은 동생 두나만 혼자 두고 석진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자매의 부모는 무책임하게도 어린 자식들만 남겨둔 채 집을 나가 버렸거든요. 배두나는 엄마 얼굴도 모른 채 언니 종옥을 엄마처럼 여기며 자랐고, 술주정뱅이였으나마 좀 더 오래 곁을 지켜주던 아버지도 종옥이 성년이 되면서부터는 딸들을 무참히 버렸습니다. 결국 동생을 위해 종옥은 눈물로 사랑을 포기하고, 서울역에서 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던 석진은 한 장의 엽서만 남긴 채 사라진 후 16년의 세월이 흘렀죠. 그 동안 외로이 혼자 해외를 떠돌며 지내던 김석진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의 지갑 속에는 아직도 16년 전, 종옥과 두나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했던 남자는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선물을 주려 했던 것이죠. 김석진은 이제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비로소 하려던 말을 모두 털어놓습니다. "가르쳐 주고 싶었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예전의 너 말고, 내가 사랑했던 스물 네 살의 너 말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된 지금, 네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가르쳐 주고 싶었어. 아름다워... 눈이 부셔... 내가 사랑했던 그 소녀보다 훨씬 더..." 눈물 가득한 종옥의 얼굴을 바라보며 석진은 이어 말합니다. "또 올게... 살다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을 때,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신 사람인지 잊어버렸을 때, 나를 찾아. 그럼 또 올게... 행복했다. 내 인생에 네가 있어서!" 바로 이 말을 해주기 위해서 죽음을 앞둔 김석진의 영혼은 김우진이라는 이름을 빌려 그녀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김우진의 실체가 무형무체의 영혼이라는 사실은 엔딩 장면에서야 밝혀집니다. 그는 오직 배두나와 배종옥 자매, 그리고 종옥의 딸 보미(고아성)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였어요.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던 김창완과 보미 부녀는 동시에 종옥과 두나를 목격하는데, 그들과 함께 있는 석진의 모습이 창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보미의 눈에는 똑똑히 보이고 있었거든요. 두 자매와 인사를 마친 석진의 영혼은 흩날리는 벚꽃처럼 반짝이며 흩어져 하늘 높이 날아갑니다. 자존감을 잃어가던 종옥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인지를 일깨워주고, 자전거를 가르쳐주지 못해서 미안했던 꼬맹이 두나에게는 뒤늦게나마 자전거를 가르쳐준 후, 할 일을 마친 김석진의 영혼은 그렇게 훌훌 떠나간 것입니다.

 

제4화의 '바람'과 달리 제5화의 '외출'은 한 순간의 일탈이나 흔들림이 아니었습니다. 김석진이 배종옥에게 다가온 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욕심을 채우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잊고 살던 그녀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려는 것이었으니까요. 또 그 봄날의 외출로 인해 배종옥은 자신의 고귀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자존감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종옥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된 것은 사랑했던 김석진과의 재회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겠네요. 인생에서 가장 가슴 떨리는 순간은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