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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탈’ 채홍주, 너무나 서글픈 그녀의 운명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각시탈

‘각시탈’ 채홍주, 너무나 서글픈 그녀의 운명

빛무리~ 2012. 7. 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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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본의 아니게 민폐녀로 찍혔던 여주인공 목단(진세연)의 캐릭터가 드디어 제 역할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터뜨린 한 방이 무척이나 시원했던지라, 앞으로 그녀의 활약을 기대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따지고 보면 이제껏 별로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목단이 민폐녀처럼 보였던 것은 그녀 때문에 남자 주인공들이 수차례씩이나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죠. 여인으로서도 용감무쌍한 것은 얼마든지 좋으나 스스로 자신을 지킬 능력도 없으면서 걸핏하면 대책없이 튀어서 위험에 빠지니, 그녀를 사랑하거나 정의감에 넘치는 조선 남자들은 별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목단을 구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이공의 장례식에서 다짜고짜 영정에 돌을 던진 목단은 요령있게 달아나지도 못하고 즉시 체포될 위기에 처하는데 (사실 그 정도의 대형사고를 치려면 동료들과 의논하여 미리 철저한 계획하에 진행하든가, 아니면 스스로 신체적인 능력이 탁월해서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다든가 하는 대책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 대책도 없이 충동적으로 돌을 던진 듯해서 정말 황당했다는...;;) 마침 1대 각시탈 이강산(신현준)이 나타나 구해주었죠. 그 때부터 일본 경찰은 목단을 주시하게 되고, 그녀가 번번이 각시탈을 잡기 위한 미끼로 이용당하는 계기가 됩니다. 연약한 여자가 자기 때문에 사로잡혀 고초를 겪고 있음을 각시탈이 알게 되면, 또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곤 하니, 시청자들의 눈에는 목단의 존재 자체가 민폐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목단은 이제 달라졌습니다. 할 줄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는 게 아니라, 피할 때는 피할 줄 알고 엎드릴 때는 엎드릴 줄도 알며, 기회를 엿보았다가 상대방의 허를 찌를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일본 경찰의 미끼 노릇이나 했을 뿐 제대로 한 일이 별로 없었던 목단이 처음으로 실력을 발휘했는데, 우에노 회장의 딸 채홍주(한채아)를 비롯해서 기무라 타로(천호진)과 슌지(박기웅) 등 일본 경찰 전원이 모두 보기좋게 목단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 되고 말았군요. 그저 순진하고 욱하는 성격의 단순한 처녀인 줄만 알았더니, 차분히 머리도 쓸 줄 알고 제법입니다. 물론 그렇겠죠. 담사리의 딸이니까요.

 

수녀로 변장하여 목단을 속이려던 채홍주의 계략은, 얼핏 보기에는 감쪽같지만 내실을 따져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패착이었습니다. 충분한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실행에 돌입했기 때문이죠. 어느 종교에나 외부인은 알지 못하는 독특한 용어들과 행동 양식이 있기 때문에, 준비 없이 뛰어들었다가는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부분에서 어김없이 정체가 발각되거든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수녀들과 함께 지낸 적이 많았던 목단은, 채홍주가 성호를 긋지도 않고 덥석 찻잔을 집어들어 마시는 것을 보며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수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니까요. 죽은 루시아 수녀의 안부를 물은 것은 확인을 위한 작업이었는데, 영문을 모르는 채홍주는 엉뚱한 대답을 했으니, 얕보았던 목단에게 크게 한 방을 먹고 말았습니다.

 

 

오랜만에 그리운 아버지와도 재회하고, 사모하는 도련님 각시탈과도 서로 포옹하며 사랑을 나누게 된 (비록 그 정체가 이강토라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목단은 요즘 무척이나 행복해 보입니다. 그런데 목단의 존재가 빛나면 빛날수록, 채홍주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점점 더 초라하고 비참해 보이는군요. 그런데 저는 왠지 처음부터 목단보다 채홍주 캐릭터에 더 애정과 관심이 끌렸습니다. 목단의 캐릭터가 지극히 전형적이고 단선적인데 비해 채홍주의 캐릭터는 훨씬 신선하고 다채롭고 역동적이어서 그랬을까요.

 

여주인공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깊은 슬픔과 비극적 운명 역시 목단보다 채홍주의 것이 압도적으로 강렬합니다. 지금까지는 분량이 적어서 돋보이지 못했으나, 채홍주의 활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어느 쪽이 여주인공인지 헛갈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제작진이 캐릭터를 편애하여 12회의 에피소드와 비슷한 것들을 줄창 만들어낸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요. 최고의 스파이가 애송이한테 크게 한 방 먹었으니 다음 차례에는 채홍주의 반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흐름상 자연스럽겠죠.

 

 

조선인이면서 일본인을 아비로 섬기고, 스스로 일본인이 되어 조선독립군을 말살하려는 채홍주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동족들이 어린 그녀에게 못할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독립군은 그녀의 아버지가 부자이면서도 독립자금을 후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괘씸히 여겨서 그를 죽였습니다. (어처구니 없지만, 홈페이지에 설명된 내용이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그 충격을 못 이겨 아버지를 따라 저 세상으로 떠났고, 하인들은 주인 내외가 비명횡사하자 옳타꾸나 하면서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삽시간에 부모 잃은 고아가 되고 땡전 한 푼 없는 거지 신세가 되었을 때, 홍주의 나이는 고작 아홉 살이었습니다.

 

짐작컨대 채홍주의 아비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 농민들의 피를 빨아 곳간을 채우는 악덕 지주였으니까, 독립군이 나서서 천벌도 대신 내리고 겸사겸사 독립자금도 얻고자 했던 거겠지요. 설마 착한 사람인데 독립자금을 후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이지는 않았겠지요. 하인들이 그 죽음을 서러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악에 받쳐 집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만 봐도, 채홍주 아비의 인품에 대해서는 좋은 추측을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린 딸에게야 무슨 죄가 있을까요?

 

그녀가 조선독립군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채홍주가 아니라 누구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들이 부모를 죽이고 자기의 살 길을 캄캄하게 만들었는데, 아홉 살 아이에게 애국심이나 조선독립 따위가 무슨 의미였겠습니까? 어린 몸뚱이 하나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지라, 홍주는 살기 위해 스스로 기생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어찌 안 했을까마는, 독하게 입술을 깨물고 버텨온 이유는 조선독립군을 말살시켜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독기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채홍주의 몸에는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그녀가 선택한 길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수반하게 될 것입니다. 점차로 진실을 깨닫게 되면 자기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조선독립군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도 불가항력적으로 이해하게 되겠지요.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첫째는 그녀가 조선 여자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녀가 조선 남자 이강토(주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운명인가요? 목단은 자기가 원래 서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하죠. 그러나 자기가 원래 소속된 곳을 외면하고 적대적인 위치에 서 있는 채홍주의 입장은 다릅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온 데다가,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았기에 이제 와서 포지션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흐르는 조선인의 피와, 사랑하는 남자의 절박한 애국심은 점차로 그녀의 마음을 모질게 흔들어댈 것입니다.

 

 

채홍주의 입장이 정말 딱한 이유는 아무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일본 최고의 세력가인 우에노 회장(전국환)의 눈에 들어 기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그의 양녀가 된 것은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우에노 회장은 채홍주의 독특한 내력을 알고 그녀를 철저히 이용하기 위해서 양녀로 들였을 뿐, 추호의 애정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채홍주도 우에노 회장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양아버지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진심이야 어떻든 간에 외면적으로 베풀어 준 은혜만 해도 너무 크다고 여겨서인지도 모르겠군요. 자기 목표를 이루려면 양아버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도 했고요.

 

조선에 파견된 채홍주가 일처리를 만족스럽게 해내지 못하면, 우에노 회장은 그녀의 최대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인의 핏줄을 들먹여 기함하게 합니다. 여차하면 양녀고 뭐고 가차없이 내쫓아 조선인 신분으로 돌려 놓겠다는 협박이지요. 그렇게 바짝 긴장시켜 놓았다가 적절한 시기가 되면 우에노 회장은 따스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가, 딸자식이 평소 즐겨 먹던 음식을 일부러 장만하여 조선으로 부쳐주는 자상함을 발휘합니다. 그러면 채홍주는 감격의 눈물조차 글썽이며 더욱 임무에 열성적으로 임하게 되지요. 하지만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사용하는 우에노 회장의 마음속에 채홍주는 그저 한 마리 영특한 당나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조선인 채홍주는 진짜 일본인 우에노 리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일본은 그녀를 진심으로 받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돌아갈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는, 조선인에게는 미움을 받고 일본인에게는 이용만 당하는, 그 어느 곳에도 마음 붙이거나 기댈 곳 없는 것이 채홍주의 잔인한 운명입니다. 어쩌면 채홍주의 이러한 운명은 주인공 이강토와 많이 닮았네요. 목적과 이유는 달랐지만, 이강토 역시 한 때는 조선을 배신하고 일본의 편에 서 있었죠. 어머니와 형을 잃고 뒤늦게 각성한 후에도, 돌이킬 수 없는 지난 날의 과오들은 그대로 남아 번번이 이강토의 앞길을 막곤 합니다. 아무리 호의를 베풀려 해봤자 동족들은 그를 믿지 않고 여전히 증오했으니까요. 어쩌면 채홍주도 나중에는 이강토와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될까요?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도 채홍주의 앞날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결국 이강토는 목단의 남자니까요. 하필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않았어도 인생이 조금은 편했을텐데, 왜 채홍주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걸까요? 오래 전 기생 신분으로 남자들에게 농락당할 때, 꼭 한 번 자기를 구해주었던 이강토의 그 모습을 채홍주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강토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지워져 버린 기억일테지만, 채홍주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가슴 설레는 추억으로 남아있는 거죠.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무조건 자기 편을 들어 주었던 유일한 사람... 자기를 도와준 대가로 죽을 뻔 했는데도 비굴함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이강토의 당당한 모습은 채홍주의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새겨졌으니, 아마도 그녀는 일본에서의 외로운 생활 속에도 틈틈이 그 기억을 떠올리며 위로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대에서 노래하던 채홍주가 소리쳐 경고해 주지 않았다면, 이강토는 벌써 담사리가 이끄는 독립군 조직의 암살 계획에 희생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겁니다. 그 암살 계획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고 결과적으로는 각시탈을 잃지 않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이지만, 이강토의 등 뒤에서 번쩍이던 칼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진심을 담아 애절하게 피하라고 외치던 채홍주의 마음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잔합니다. 어차피 그녀의 운명은 이래저래 비극일 수밖에 없겠지만,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강토의 진실한 사랑을 받게 해주면 안 될지... 그 한 순간의 기쁨만이라도 간직하고 떠나게 해주면 안 될지... 그런 작은 소망 하나가 생겨납니다. 평생 외로움 속에 이용만 당하다가 그대로 떠나는 건 너무 서글프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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