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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한풀이 굿 한 판 보러 갈까나?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뮤지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한풀이 굿 한 판 보러 갈까나?

빛무리~ 2012. 6. 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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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좋아라 하며 뮤지컬 시연회를 보러 갔습니다. 공지영의 원작은 이미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뮤지컬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어떤 형식의 변화가 있었을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원래 뮤지컬을 무척 좋아하고, 이제까지 그 어떤 뮤지컬을 보고서도 실망한 적이 없었지요. 설령 대중적인 재미가 없는 작품이더라도, 저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적인 뮤지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저의 그러한 자신감을 단숨에 박살내고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게 해주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참 고마운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뮤지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새로운 형태의 '리추얼 뮤지컬'이라고 합니다. 당최 그 '리추얼 뮤지컬'이라는 게 뭔지, 자세히 알아보고 가지 않은 것이 문제였죠. 관람 계획이 있는 분들은 '리추얼 뮤지컬'이라는 독특한 장르에 대하여 필히 사전조사를 하고 가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적성에 맞는다면 깊은 감동을 느낄 것이로되,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1시간 30분 동안 가슴 속에서 점점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짜릿한 당혹감을 만끽하다가 나오시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리추얼(ritual)'이라는 단어는 (종교상의) 의식 절차 또는 (제의적) 의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리추얼 뮤지컬'이란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제의식과 굿 형식을 토리극에 접목하여 일종의 굿 형태로 만들어진 제의적 뮤지컬입니다. 1시간 30분 동안 약간 변형된 형식의 굿 한 판을 보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하네요. 뮤지컬은 시종일관 죽은 영선의 혼을 위로하는 진혼굿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연출과 주연을 맡은 김만중 교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차차웅'이라는 신의 제자 캐릭터로 등장했는데, 영선의 과거 행적이며 남편과의 불화,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은 모두 그의 나레이션으로 처리됩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한 명이 혼자서 열연하는 모노드라마입니다.

 

 

김만중 교수는 1시간 30분 동안 쉬임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대사를 물 흐르듯 거침없이 소화해내는데, 대사에는 독특한 가락이 있습니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그 단조로운 가락은 1시간 30분 동안 변화없이 똑같은 형태로 계속됩니다. 노래라기보다는 속도가 느린 랩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중간에 아주 잠깐씩 노래가 나오기는 합니다..;;) 차차웅의 이미지는 박수무당... 이라기보다는 위엄있는 제사장 쪽이라고 해야겠네요. 몸 속에 어느 영혼이 들어갔느냐에 따라 그는 1인 다역을 합니다. 진혼굿의 주인공이 영선이니까 주로 영선의 시점이 되기는 하지만, 때로는 혜완의 죽은 아기가 되어 엄마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무속신앙에 관심이 많고 호의가 있는 분들께는 적극 추천할만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무속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생뚱맞다고 여기거나, 약간이라도 거부감이 있는 분들은 솔직히 만류하고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지루할 뿐만 아니라, 주연 배우의 손에 들려 수시로 등장하는 소품들... 너풀거리는 한복 치맛자락이라든가 얼굴 반쪽짜리 가면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썩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거든요. (때로는 섬뜩..;;) 저는 "기다리다 보면 누군가 다른 배우가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꾹 참고 있었는데, 장막 뒤로 사라졌던 김만중 교수가 매번 새로운 소품을 들고 혼자서 다시 등장하는 것을 한숨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연회라서 그랬던 건지 모르지만, 여배우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팜플렛에는 분명 서현선이 출연하는 것처럼 나와 있던데..;;) 또한 탤런트 손현주, 박철민, 정흥채가 우정출연을 한다기에 퍽 기대를 했었지만, 역시 시연회에서는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하긴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그 탤런트들이 매 회마다 우정출연을 해줄 수는 없겠죠. 특히 최근 드라마 '추적자'의 주인공을 맡은 손현주의 경우는 더욱 바쁠테니, 아마도 날 잡아서 하루 정도나 와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대 위에는 김만중 교수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지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양쪽 사이드에 자리잡은 두 청년은 1시간 30분 동안 쉴새없이 드럼과 북을 쳐대면서 신명나는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주연배우의 끝없이 길고 단조로운 대사와 마찬가지로, 연주도 별다른 변화 없이 1시간 30분 동안 비슷한 리듬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적응이 잘 안 되더군요.

 

 

김만중 교수는 열연하는 도중에 객석으로 내려와, 영선의 친구 '경혜'와 '혜완' 역을 맡아줄 관객을 무작위로 섭외합니다. 미리 약속해 두고 뽑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필이면 무대공포증 있는 사람이 '경혜' 역으로 선택되어서 쌍방간에 무진 애를 먹었습니다. 김만중 교수의 지시에 따라 관객들은 격려(?)의 박수를 쳤고, 그 압박에 못이긴 여자분은 마지못해 무대 위로 올랐지만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혜완' 역으로 선택된 남자분은 다행히 무대를 즐기시는 편이라서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관객 섭외 형식을 좀 바꾸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무대에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이 진혼굿을 통해 죽은 영선의 혼이 평화로운 안식을 찾았다면 어쨌든 의미가 있겠지요. 원작 자체가 벌써 20여년 전의 소설인지라, 그 시대 여성들의 심경을 현재의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는 좀 어려울 듯합니다. 하지만 40대 후반 이상의 높은 연령층이라면 이 주제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엄마와 함께 다시 보고 싶은 뮤지컬" 이라고 호평도 하시더군요.

 

 

"지혜롭고 성실하며 예의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그와 함께 가라. 그렇지 않으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문장은 아마도 이 작품의 주제라고 생각되네요. 남편으로부터 폭력과 무시와 냉대를 당하면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지속하다가 알콜중독자가 되고 급기야 자살해 버린 영선처럼, 현재도 그런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여성들을 향해,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치는 걸까요? 만약 그러한 여성 중 한 명이라도 이 뮤지컬을 통해 용기를 얻고 새 삶을 시작한다면, 더 이상 좋은 일이 없겠지요. 삶의 방식이 꼭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실험적인 이 뮤지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는 제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서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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