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고쇼' 김범수의 보고싶다, 미친 노래쟁이의 고백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고쇼' 김범수의 보고싶다, 미친 노래쟁이의 고백

빛무리~ 2012. 6. 2. 08:15
반응형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김동인 단편집에서 '광염소나타'라는 소설을 읽고 처음엔 공포심을 느꼈지만 나중에는 그 감정이 점차 분노로 변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을 간략히 언급한다면, 젊은 작곡가 백성수는 야성적 천재성을 타고났지만, 원인 모를 병세가 점점 악화되면서 강도 높은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작곡을 할 수 없게 되었죠. 그는 마침내 작곡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 방화, 살인, 시간(屍姦) 등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음악은 가히 명작이라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체포된 백성수는 예술가협회의 탄원으로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는데, 그의 후견인이었던 K선생은 이러한 천재를 단순한 사회윤리에 입각하여 말살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눈물로 하소연한다는 내용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렸을 때부터도 저의 사고방식은 예술지상주의나 탐미주의와는 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 쪽보다는 인본주의에 한층 가까웠죠. (엄밀히 그 속뜻을 따진다면 저는 인본주의도 아니지만...) 그래서 저는 백성수의 행동을 옹호하는 K선생의 논리를 궤변이라 여기며 분노했습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작곡을 했던 백성수의 행동을 무조건 이성적 기준으로 단죄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그 행위를 옹호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아무리 주장해봤자 피해자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는 없을 테니까요. "만약 자기 가족 중 한 사람이 백성수에게 살해당했어도 K선생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어린 나이에도 저는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문득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린 이유는 '고쇼'에 출연한 김범수의 충격적인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데뷔 초의 김범수는 노래에 감정을 싣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답니다. 테크닉으로만 노래를 부르는 것 같고 좀처럼 감정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지적을 수없이 받다 보니, 김범수로서는 그 부분이 음악적으로 넘어야 할 큰 산처럼 여겨졌답니다. 그 때 김범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했고, 첫사랑과의 인연이 오래 지속되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별의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더군요. 그런데 불러야 할 노래는 주로 이별의 아픔을 토해내는 애절한 곡들이 많았으니, 감정이입이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노래 '보고싶다'를 녹음할 무렵, 김범수의 고민은 극에 달했습니다. 감정이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녹음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위기상황이었어요. 급기야 김범수는 인위적으로라도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서, 느닷없이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게 됩니다.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완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겠죠. 당연히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유를 물었으나, 정작 헤어져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김범수는 "그냥 네가 싫어졌어!" 하는 식으로 더욱 독하게 굴었습니다. 그 후...

 

노래를 부를 때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애절한 감정이 목소리에 듬뿍 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별이었지만, 지금 울고 있는 그녀의 슬픔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성공적으로 녹음을 마치고 '보고싶다'라는 명곡이 탄생했는데,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그 훌륭한 노래는 어디까지나 김범수의 것인데, 그 노래를 탄생시키기 위해 지독한 슬픔을 견디며 고통받아야 했던 것은 김범수가 아니라 애먼 그녀였으니까요. 강도를 따진다면 비교할 수조차 없이 미약하지만, 김범수의 그와 같은 행동은 '광염소나타'의 주인공 백성수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명곡 탄생을 위해 희생당한 사람이 작곡자나 가수 본인이 아니라 억울한 타인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슷하죠.

 

정말로 헤어질 생각이 없었던 김범수는 녹음을 마치고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 용서를 빌었고, 자초지종을 알게 된 그녀는 가벼운 원망과 더불어 그를 이해하며 다시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랑은 이어졌지만, 김범수의 말에 의하면 12년쯤 되니까 사랑의 유통기한이 다 되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군요.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여한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슬픔이나 아쉬움 없이 쿨하게 좋은 마음으로 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생각도 같을지는 의문입니다. 첫번째의 거짓 이별과 마찬가지로, 두번째의 진짜 이별도 김범수 쪽에서 먼저 통보했던가봐요. (착해 보이는데 은근히 나쁜 남자..;;) 그녀는 왜냐고 묻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한 번 안아 줘" 라고 말하더랍니다. (흑흑..;;) 12년의 사랑은 그렇게 끝을 맺고...

 

 

김범수는 그녀와의 사랑을 추억하며 이별의 아픔을 담아 '끝사랑'이라는 또 하나의 노래를 탄생시킵니다. 지금 그녀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노라고 김범수가 말하더군요. 그런데 듣고 있던 윤종신이 불쑥 말했습니다. "저는 중간의 그 짧은 이별이 진짜 이별에도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아무리 거짓 이별이었다고 해도 그분은 진심이었잖아요.." 그렇죠. 저도 분명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기꺼이 다시 받아주고 그 후로도 오래 사랑했지만, 거짓 이별이라는 아픈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녀의 믿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가 버렸을 거예요.

 

이 남자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내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것... 이 남자는 음악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또 다시 나에게 이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이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사랑을 지속하는 여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남자(김범수)는 전혀 눈치도 못 챈 듯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거짓 이별 후 진짜 이별에 이르기까지 몇 년 동안 무척이나 쓸쓸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면서도 가슴 한켠이 뻥 뚫린 듯 허전했을 것이고, 언제든 그가 또 다시 이별을 말해 올 날을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겠죠. 드디어 그 날이 왔을 때,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달라 했던 그녀... 김범수를 참 많이 사랑했던가봐요.

 

물론 김범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랑했겠죠. 그의 사랑이 거짓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녀의 진실한 사랑에 비해서는 꽤나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군요. 그런데 참 신기한 건 말입니다. 김범수의 이야기대로라면 '보고싶다' 라는 노래가 작곡 작사되어 다 만들어지고 나서, 그 노래를 연습하다가 잘 안 되니까 '거짓 이별 사건'을 벌인 게 순서가 맞는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보고싶다'의 가사를 곰곰히 새겨보면, 마치 김범수가 벌인 사건을 미리 알고 쓴 것처럼 그 상황에 꼭 맞아떨어집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난 못 가 ... 바보처럼 울고 있는 너의 곁에...

상처만 주는 나를 왜 모르고 ... 기다리니 떠나가란 말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런 내가 미워질 만큼 ...

울고 싶다... 네게 무릎꿇고 ... 모두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면 ...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너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너는 바보처럼 기다리며 울고 있다...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다. 그래서... 이런 내가 미워진다... 네 앞에 무릎꿇고 울며 용서를 빌고 싶다... 모두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내용은 김범수가 당시 여자친구에게 하고 싶었던 말 그대로가 아닐까 싶은데요. '보고싶다'의 가사를 지은 윤사라가 김범수의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도 않고 일의 순서상으로도 맞지 않는데, 이렇게 상황과 가사 내용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니 약간은 소름이 돋더군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역시 명곡은 운명적으로 탄생하나보다. 그렇다면 누굴 탓할 일도 아니었어. 불가항력이었겠지!"

 

 

노래에 감정을 싣기 위해서 일부러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이별까지 고했던 지독한(?) 녀석... 듣자하니 김범수는 무명시절뿐만 아니라 세상에 이름을 알린 후에도 꼬박꼬박 하루 5시간 이상을 노래 연습에 할애하고 있다는군요. 이쯤되면 '미친 노래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네요. ('노래쟁이 김범수' 라는 이름의 팬카페도 있던데요?^^) 저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그 열정적인 예술혼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그랬노라고 담담히 회상하는 김범수... 그는 이제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는 살아있는 천재로서 우리에게 오랫동안 행복을 전해주리라 믿습니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