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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킹 투하츠' 이승기, 그 다중적이고 현실적인 인간형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더킹 투하츠

'더킹 투하츠' 이승기, 그 다중적이고 현실적인 인간형

빛무리~ 2012. 4. 2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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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킹 투하츠'는 보면 볼수록 참 신기한 드라마입니다. 가장 비현실적인 설정하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섬뜩할 정도로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으니 말이죠. 현재 대한민국은 입헌군주제 국가도 아니고 북한과의 관계도 드라마 속에 그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지만,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캐릭터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두 언제 어디선가 현실 속에서 본 듯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느낌을 주는 드라마는 처음이에요.

 

보통 드라마 속 인물은 그 성향과 특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일관된' 말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그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를 시청자들이 뚜렷이 인식해야 몰입이 수월하기 때문이죠. 실제로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캐릭터가 굉장히 단순합니다. 착한 놈은 항상 착하고 나쁜 놈은 항상 나쁘고 웃기는 놈은 항상 웃긴다는 식으로 일관성있게 행동할 뿐, 복잡하거나 다중적인 인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런 드라마는 일단 머리를 비우고 보기에 편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더킹 투하츠'는 여러모로 정말 용감하고 실험적인 작품입니다. 살짝 건드리기도 겁날 만큼 민감하고 묵직한 이슈들을 거침없이 콱콱 찔러대며 휘두르고 있을 뿐 아니라, 캐릭터 설정면에서도 여타 드라마와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택하고 있거든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민감한 사안들이 툭툭 튀어나올 때마다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감정도 발생하니 그러잖아도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닌데, 등장인물들도 꽤나 복잡한 성격을 지녔기에 단순히 좋은 놈이다 나쁜 놈이다 규정지을 수 없으니 골치가 아픕니다. 한 마디로 시청자에게 매우 불친절한 드라마예요.

하지만 저는 '더킹'을 보면 볼수록 그 불친절함에 빠져듭니다. 다중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캐릭터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내는 홍진아 작가의 능력은 놀랍기만 합니다. 등장인물이 시시각각으로 다른 태도를 보이고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일관성 없는 캐릭터라고 느껴지지 않게 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거든요. 원래 현실 속의 인물은 다 그렇지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괜히 화를 내기도 하고, 웃으면서 뒤통수를 치기도 하지요. 오죽하면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마저 있을까요.

 

별다른 특징 없는 평범한 중년부인으로서 연약하고 소심해 보이던 대비(윤여정)가 막상 큰 일이 닥치자 누구보다 강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준다든가,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을만큼 깜찍발랄하던 공주(이윤지)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험한 욕설을 퍼붓는다든가, 누구보다 충직해 보였던 비서실장 은규태(이순재)가 선악을 판가름하기 어려운 야누스적 인물로 재탄생한다든가, 거의 모두 그렇지만 특히 주인공 이재하(이승기)의 절묘한 캐릭터는 볼수록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재하는 기본적으로 참 잘난 인물입니다. 훤칠한 외모와 높은 지능과 담대한 용기를 지녔군요. 죽은 형 이재강(이성민)과는 타고난 성격도 다르지만 후천적 인품도 다르게 자라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짊어지고 왕의 교육을 받았던 이재강은 그 무엇 하나 자유롭게 행할 수 없었기에 점점 더 차분하고 신중한 성품이 되어갔지만, 그런 부담이 없었던 이재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면서 점점 더 제멋대로의 날라리가 되어갔지요. 평생토록 생계 따위를 염려할 필요가 없는 왕족의 고귀한 신분은 그에게서 두 가지 미덕을 앗아갔는데, 바로 '인내심'과 '배려심'이었습니다. ('인내심'과 '오기'는 엄연히 다른 것이기에...^^)

왕제 시절 이재하의 자유분방한 행각은 국민의 신망을 잃게 했고 '쓰레기'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기심의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 이재하는 아주 많은 장점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드라마 초반에 저는 이재하를 보면서 얼마나 많이 놀라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던지 모릅니다. 같잖은 날라리인 줄만 알았는데 그 영민함과 담대함이 보통 아니더라고요. 그는 자기 얼굴에 똑바로 겨누어진 총구를 보면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고, 북한 지역에 억류되어 진짜 목숨이 위태롭다 느껴지던 순간에도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똘끼 충만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비웃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마당에 열 중 아홉은 비굴해지게 마련인데, 과연 이재하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국왕인 형 앞에서도, 북한 사람들 앞에서도, UN 의 강대국 대표들 앞에서도, 심지어 절대악의 카리스마를 내뿜는 김봉구(존 마이어, 윤제문) 앞에서도, 이재하는 단 한 번도 기죽거나 밀린 적이 없습니다. 당찬 기세와 자신감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도 쉽게 반박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 유려하고 거침없는 말발은 어지간한 내공이 없다면 시전 불가능한 기술이었죠. 그의 껍데기만 본 사람들은 만날 하릴없이 여자들과 놀러만 다니던 쓰레기로 알았지만, 이재하는 오래 전부터 국제정세에 밝고 사리분별력이 뛰어난 왕재(王才)였던 겁니다. 드라마에 나오지는 않았으나 사실은 기존의 독서량도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되는군요.

 

이재하는 갑작스런 형의 죽음으로 준비 없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 특유의 영민함과 담대함으로 정국을 차츰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에게 결핍된 두 가지 덕목은 함정이 되고 말았군요.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조금만 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했더라면 그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사실은 자기도 그녀를 사랑하면서, 일시적으로 울컥하는 심정을 누르지 못하고 김항아(하지원)를 북으로 돌려보낸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지요. 덕분에 어머니인 대비로부터 "너 정말 쓰레기구나. 국물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도 너보다는 낫겠다!" 라고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지만 이재하는 한 마디 변명도 하지 못합니다.

대한민국 왕실에서 받은 모든 것을 두고 가라는 명령하에, 김항아는 옷과 신발과 액세서리 등 모든 것을 벗어놓고 북한 처녀의 한복 차림으로 돌아갔습니다. 강한 여전사이며 청문회에서도 의연하던 그녀였지만,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얻고 싶었던 사랑에게 버림받은 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남들 시선을 피해 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던 항아의 모습이 어찌나 슬프던지요. 그런데 설상가상, 북으로 돌아가서야 알지 못했던 임신 사실이 밝혀졌고 불행히도 그 아이는 유산되었습니다. 앞으로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나, 일단은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입니다.

 

기껏 친하게 지내보자는 의미에서 딸자식을 시집보냈더니 소박데기가 되어 돌아온 것도 분통 터지는 노릇인데, 정식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까지 갖게 해놓고서 모질게 내쫓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북한측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남조선 국왕은 우리 인민의 딸을 능욕하고 그 아기마저 무참히 버렸다. 남조선 국왕은 천하에 상종도 못할 놈이라는 게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북한 아나운서의 비분강개한 어조가 아니더라도, 이 심각한 사안은 곧장 전쟁으로 이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싶을 정도입니다.

 

한편 남쪽에서도 국왕 이재하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왕이 의문스레 죽음을 맞이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비통한 상중에 미혼의 약혼녀와 동침을 한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켜 놓고는 나몰라라 내쫓았으니, 국제적으로도 망신살이 제대로 뻗쳤고 인간적으로도 차마 그럴 수 없는 못된 짓을 한 셈이니 말입니다. 이제는 온 국민이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쓰레기!"라 외친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재하는 분명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것이며, 그 과정에서 더욱 눈부신 성장을 이루겠지요. 그래야만 이 작품의 목표와 주제를 살릴 수 있으니까요.  

이재하라는 인물은 볼수록 정말 다채롭습니다. 내면적으로는 영웅적 성품을 지닌 강한 남자이지만, 외면적으로는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입니다. 여자에겐 더없이 나쁜 놈인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썩 괜찮은 의리와 다정한 진심도 갖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침을 퉤퉤 뱉을 만큼 경멸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고개가 절로 숙여질 만큼 존경스럽고, 때로는 후려치고 싶을 만큼 얄미우면서, 때로는 감싸안고 싶을 만큼 달콤합니다.

 

이렇게 어제와 오늘이 똑같지 않고, 5분 후의 행동을 짐작할 수 없는 이재하의 캐릭터는, 다중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현실적입니다.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면서도 자기 특징을 확실하게 어필하는 캐릭터가 있었던가요? 이재하의 언행에는 분명 일관성이 없건만, 시청자는 조금도 헛갈리지 않고 있습니다.

 

홍진아 작가도 대단하지만, 이 어려운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하고 있는 이승기의 연기력도 참으로 놀랍군요. 이재하는 사고(思考)와 감정선이 너무나 복잡하고 섬세한 캐릭터라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두뇌 명석한 연기자가 제격일 듯 싶은데, 어쩌면 이 역할은 처음부터 이승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까지 힘내 주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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