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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의 남자' 섬뜩한 반전, 문태주도 악역이었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적도의 남자

'적도의 남자' 섬뜩한 반전, 문태주도 악역이었다?

빛무리~ 2012. 4. 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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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극의 지존이라는 엄태웅의 칭호는 지극히 당연한 것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차가운 복수심에 불타는 남자의 내면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있을까요? 특히 이번에는 처음으로 맹인 연기에 도전함에 있어 많은 연구와 노력을 했음이 엿보입니다. 눈을 뜨고 있되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공허한 눈동자를 얼마나 실감나게 표현했는지, 각종 포털의 인기 검색어에는 '엄태웅 동공연기'라는 단어가 떠올랐군요. 엄태웅은 눈동자뿐만 아니라 표정과 몸짓과 언어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갑작스레 눈이 멀어버린 사람의 절망과 공포를 나타냈고, 차츰 기억이 떠오르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 싹트기 시작하는 통렬한 분노와 복수심을 형상화시켰습니다.

 

엄태웅의 명품 연기와 더불어 '적도의 남자' 5회는 방송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만큼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장일(이준혁)은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김선우(엄태웅)가 자신의 악행을 기억해낼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일상생활을 지속하는 독한 면모를 보여주었지요. 하지만 김선우는 이미 모든 기억을 되찾고도 내색하지 않고 있으며, 또 다른 친구 최수미(임정은)도 진실을 거의 눈치챈 듯합니다. 수미는 최광춘(이재용)의 증언을 통해 장일 아버지가 선우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장일의 냉혹한 성품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장일이가 선우의 입을 막고 자기 아버지의 범죄를 덮기 위해 못할 짓을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아역과 성인역의 나이차가 큰 관계로, 시간의 흐름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맹점은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람이 바뀌는 바람에, 김선우가 잠들어 있던 시간은 족히 10년 이상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고작 2~3년 후였더군요. 대학 신입생이었던 이장일과 한지원(이보영)이 아직도 대학생인 것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2~3년만에 사람들의 외모가 그렇게 확 바뀌다니..;; 게다가 옷을 갈아입는 엄태웅의 상반신은 왜 보여준 걸까요? 몇 년씩이나 침대에 누워만 있던 사람의 울끈불끈한 근육질 몸매를 보면서 감탄이라도 하라는 건지..;; 이렇게 화면상으로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내용상의 퀄리티는 거의 만점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5회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따로 있었습니다. 4회까지만 해도 적도의 남자'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의 복수극처럼 보였는데, 의외로 이 작품은 복잡한 심리게임일지도 모르겠어요. 과연 누가 악인이며 누가 선인인지, 무엇이 악행이며 무엇이 선행인지, 깊은 고민에 빠지도록 만드는 작품이 될 듯 합니다.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역이라 생각했던 진노식(김영철) 회장에게도 사실은 깊은 사랑의 상처와 인간적인 고뇌가 존재했으며, 주인공 김선우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선역인 줄만 알았던 문태주(정호빈)가 사실은 진노식 못지 않은 악역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5회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내가 하룻밤 데리고 놀던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어. 그 아이는 내 자식일 리도 없고,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받아줄 이유는 없다!" 선우의 장래를 부탁하러 찾아왔던 김경필(이대연)을 향해 진노식은 차갑게 쏘아붙였습니다. 곧이어 김경필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진노식을 보고, 저는 그 말이 모두 사실이라 믿었었지요. 선우의 생모 은혜는 명목상으로만 진노식의 약혼녀였을 뿐 그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항상 외로웠고, 곁에서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던 문태주는 지극히 순수한 사랑으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두 사람 사이를 진노식이 과도하게 의심하면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습니다. 

 

"은혜야... 내는 추위를 많이 탄다. 가을에도 춥고 봄이 와도 춥다. 근데 이상하제? 은혜 니를 만나고부터는 춥지가 않더라. 나같은 놈이 어째 은혜 니처럼 고운 여자를 만났을고? 은혜야, 니가 내를 떠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 영원히 내 옆에 두고 싶은 욕심... 내는 요즘 감기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데이!" ...... 그렇군요. 진노식은 은혜를 사랑했습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그 냉혹한 남자가 두려움에 휩싸일 만큼, 진심으로 온 정성을 다해 그녀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약혼녀 은혜와 친동생처럼 아끼는 후배 문태주로부터 진노식은 뼈아픈 배신을 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진노식의 눈을 피해 노골적인 애정 행각을 일삼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진노식은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거야말로 '잘못된 만남'의 가사 그대로가 아닙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난 울었어~ 내 사랑과 우정을 모두 버려야 했기에~"

 

게다가 은혜가 처음으로 자기의 임신 소식을 알린 사람도 진노식이 아니라 문태주였습니다. 문태주가 "형님에게 알리겠다"고 말하자, 은혜는 "안 돼요, 알리면 안 돼요!" 하고 말립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짐작컨대, 선우의 생부는 문태주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군요. 진노식의 아이를 가졌으면서도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진노식은 분노에 치를 떨며, 은혜가 임신한 아이를 문태주의 씨앗이라 단정지어 버립니다. 문태주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내고, 갈 곳 없는 은혜를 무일푼으로 내쫓은 것도 그 이후의 일이었지요.

이와 같은 과거의 행적을 통해, 비록 악인이지만 진노식에게는 역동적인 인간미가 덧입혀졌습니다. 누구보다 믿고 사랑하던 애인과 친구에게 처절히 배신당한 고통을, 중견배우 김영철의 노련한 연기를 통해 깊이 공감하게 되면서, 더 이상 진노식을 미워할 수만은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반면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문태주에게서는 만만찮은 악역의 향기가 풍기기 시작하는군요. 진노식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은 문태주나 김경필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문태주는 왜 출소한 후에도 은혜와 그 아들을 찾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혼자 외국으로 날아가 사업을 일으키고 성공하는데만 주력했을까요?

 

김경필은 은혜의 애인도 아니고 선우의 친부도 아니었지만, 과거 진노식의 악행을 도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고, 그 가엾은 아이를 찾아내어 자기 아들로 키웠습니다. 이렇게 선량한 김경필의 인품과 비교할 때, 은혜와 그 아들에 대해 훨씬 큰 책임감을 느껴야만 했던 문태주의 나몰라라 행각은 매우 냉혹하고 이기적입니다. 그래 놓고 이제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문태주는 아들을 찾겠다며 럭셔리한 모습으로 돌아오는군요. 과연 이 사람을 선역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의 진정한 목표는 아들을 찾아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이용해서 진노식에게 복수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김선우의 생부가 진노식이라면, 문태주는 가장 악랄한 복수의 방식을 선택한 셈입니다. 네 아들의 손으로 너를 파멸시켜 주겠다는 거죠. 가장 드라마틱한 전개가 이루어지려면 김선우의 생부는 진노식이어야겠군요. 그나저나 은혜는 정말 얌전하고 순수해 보이는 여자였는데, 도무지 아비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자식을 낳아 놓고 떠났으니,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주인공 김선우는 매우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지금껏 서술된 내용으로 보아 그의 생부와 생모는 별로 괜찮은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엄태웅이 주연을 맡았던 김지우 작가의 2007년작 '마왕' 역시, 시청자들로 하여금 복수의 옳고 그름에 대한 깊은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작품입니다. 고교 시절 사악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 후에는 모두 개과천선하여 현재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 강오수(엄태웅)와 그 친구들... 하지만 그들의 범죄로 인해 어머니와 형을 잃었던 오승하(주지훈)는 십여년간 복수심을 불태우며 힘을 길러왔는데... 오승하의 복수가 차츰 실행되면서 드라마는 처참한 비극으로 흘러가지요. 그들의 범죄로 인해 오승하의 인생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의 복수를 차마 탓할 수도 없지만, 깨끗이 뉘우치고 잘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는 모습은 속시원한 복수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지독한 고뇌와 슬픔만을 느끼게 했을 뿐입니다.

진노식과 문태주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면서 '적도의 남자' 역시 그와 같은 존재론적 고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듯 싶군요. 과연 누가 진정한 악인인가? 복수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통쾌한 복수의 승리감을 기대하기보다,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좀처럼 선악을 판가름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매 순간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새삼스레 고민 한 번 해보자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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