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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세 살배기 강채윤, 아버지 세종 앞에 서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세 살배기 강채윤, 아버지 세종 앞에 서다

빛무리~ 2011. 11. 1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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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13회를 보는 동안 제 머릿속에는 두 가지의 단어가 번갈아 떠올랐습니다. 의노(義怒), 그리고 아버지... 둘 다 세종(한석규)의 모습을 보면서 떠올린 것이었지요.

1. 의노(義怒)

정의로운 분노...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 본 단어이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저는 이제껏 살면서 진정한 의노(義怒)라고 여겨지는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감정의 절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사람의 감정이란 원래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손해를 입거나 기분이 상하거나 했을 때,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분노라는 감정에 밑바탕으로 깔려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애(自己愛)입니다. 상관도 없는 남의 일에 나서서 화를 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죠.

가끔은 어떤 사람들에게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이 당한 억울함을 대신 호소하며, 그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려는 사람들에게서요. 사회운동가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런 사람들에게서 때로는 의노(義怒) 비슷한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사람들 속에 몇몇의 위선자가 섞여 있는 것을 저는 보고 말았지요. 아주 교묘하게 정의로 위장한 탐욕이라고나 할까요.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섬뜩함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는 사람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을 좀처럼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을 보아도 진정한 의노(義怒)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마을을 돌며,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언덕을 이룬 모양을 보고 참을 수 없이 분통을 터뜨리는 세종의 모습은, 그 자체가 100% 순수한 의노(義怒)였습니다. 물론 세종은 역사 속의 인물이고 드라마 속의 인물이므로, 현실의 인물과 달리 그 속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긴 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임금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력과 재물이 이미 그의 손아귀에 있는데, 굳이 피곤하게 정의를 위장하면서까지 더 이상의 무언가를 욕심낼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세종의 분노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전염병을 피할 방법이 있었건만, 흔한 약초 한두 뿌리만 달여 먹는다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었던 참사였건만, 그것을 미리 알려주려고 방까지 붙였건만, 까막눈인 백성들은 글자를 읽지 못해서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시체를 보며, 세종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 백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일을 해야 하므로 어려운 한문을 익힐 시간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속이 터집니다. 그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놀라 땅에 엎드려 "살려주십시오!" 외치며 애원하는데, 무도한 권력에 짓눌려 나약하고 비루해진 백성의 모습에 세종은 가슴이 아파서 더욱 크게 화를 내고 맙니다. "내가 너희들을 죽이는 사람이냐? 어찌 나를 보고 살려달라 하는 것이냐!"

집현전으로 돌아와서도 세종의 분노는 가라앉질 않습니다. 각종 집기를 부수고 서책을 찢으며 마구 화를 냅니다. 보다못한 정인지가 세종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말리기 시작합니다. "전하, 실패가 아니옵니다. 농사직설이 보급되어 실제로 수확량이 늘고, 백성들의 살림이 풍요로워지고 있질 않습니까?" 그 동안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는 아니었다고,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노라고 아뢰는 충심이었으나, 백성들의 처참한 시체를 보고 깊이 상처받은 세종의 마음에는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오히려 더욱 화를 내며 정인지를 다그칩니다. "너는 숲만 보는 것이냐? 나무는 보이질 않아? 풍성한 숲 안에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썩어가는 것이 네 눈엔 보이질 않느냔 말이다!"

2. 아버지

사람이 화내는 모습을 보는데, 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일이 있으리라고야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요? 여기에서부터 두번째 단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성군 세종이 사랑하는 것은 '백성'이라는 포괄적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한 명, 두 명 손가락으로 가리켜 볼 수도 있고, 한 명 두 명 저마다 눈길을 맞춰 볼 수도 있는,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종은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숲을 보고 있는 정인지는 백성의 살림이 '전체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있으니 상심하지 마시라고 아뢰었으나, 나무를 보고 있는 세종의 가슴에는 이미 죽은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깊이 아로새겨지고 말았습니다.

똘복이 강채윤(장혁)과 재회한 세종은, 지존의 신분으로 그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의 아비가 죽은 것이 오로지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임금은 진심으로 사죄를 했습니다. "네가 용서한다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니라. 누군가 잊으라 해도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일 것이었느니라. 내 너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석삼이라 불리우던 노비 한 명의 죽음이 세종의 가슴에 평생토록 상처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종의 모습에서 저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느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은 원래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백성을 생각하는 세종의 마음 또한 그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요.

전염병 마을을 돌고 와서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세종은,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소이(신세경)에게 막말(?)을 퍼부어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세상이 그를 미치도록 분노하게 한 것입니다. "나는 세상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할만큼 했다고... 그런데 바뀌질 않는다. 네년도, 세상도 바뀌질 않아. 네가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는 것이 온전히 내 책임이냐? 아니다. 너는 네 인생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 너희들은 세 살배기 어린애처럼 세상을 향해 떼를 쓰고 있을 뿐이야!"

사실은 좀처럼 그의 뜻에 맞춰 움직여 주지 않는 신하들...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하라고 아무리 지시해도 말을 듣지 않아서 결국은 임금으로 하여금 몸소 똥지게를 짊어지도록 만드는 신하들에게 화가 났던 거겠지요. 혼자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스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니까요. 그 마을의 수령 또한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전염병 예방법을 구두로 퍼뜨렸다면 막을 수도 있었으련만, 귀찮다는 이유로 성의없이 방만 써붙인 것이 참사의 원인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까막눈이라서 방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요?

"나는 할만큼 했다. 그런데도 세상은 바뀌질 않는다. 그것은 노력하지 않는 너희들 때문이다. 너희들은 세 살배기 어린애처럼 세상을 향해 떼를 쓰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사실상 소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신하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게으르고 고집불통인 주제에, 현실을 나아지게 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주제에, 허구헌날 이러쿵 저러쿵 말만 많고 불평만 늘어놓는 신하들에게 세종은 화가 났던 것입니다.

그러자 소이가 조용히 붓을 들어 세종께 아룁니다. "아기라면... 키우셔야지요!" 그 말에 함축된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아버지이시니까요. 신하들도, 백성들도 모두 전하의 아기가 아니겠습니까? 못 배워서 어리석다면 가르쳐 주시고, 심성이 어려서 못난 짓을 한다면 어른이 되도록 이끌어 주셔야지요. 그렇게 키워 주시는 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하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돌한 소이는 임금의 속을 그렇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홀로 고군분투하던 세종은 드디어 자기의 마음을 척척 알아주고 손발이 제대로 맞는 협력자를 얻었습니다. 알고 보니 소이는 세종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숙원 사업인 한글 창제에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었군요. "네가 흔들리면 나도 무너진다" 라고까지 생각할 만큼, 세종에게 있어 소이의 존재는 그만큼 소중했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그녀를 떠나보내려 했습니다. 소이가 떠나면 당장 훈민정음 해례가 완성되지 않아서 숙원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세종의 인간적인 마음에도 엄청난 외로움과 허전함이 밀려들텐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그녀를 보내주려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군요.

"잘 살거라. 이 또한 어명이다..." 쿨한 척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먼저 돌아섰지만, 강채윤과 함께 멀어져가는 소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세종의 얼굴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하룻밤이 지난 후, 소이는 돌아왔습니다. 강채윤이라는 또 한 명의 강력한 협조자까지 이끌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굳건한 발걸음으로 세종에게 돌아왔습니다. 세종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소이의 성숙함에 비해, 강채윤은 무척이나 어린 심성을 지녔음이 13회에서 드러났습니다. 전하에 대한 오라버니의 복수심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밀서가 뒤바뀐 것은 전하의 뜻이 아니었노라고 소이가 말해 주었지만, 그래도 똘복이는 어린애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래, 오해라고 치자. 모두 오해라서, 그래서 내가 전하를 이해한다고 치자. 그럼, 우리 아버지는 뭐야? 내가 전하를 이해하면, 억울하게 죽은 우리 아버지만 너무 불쌍하잖아!" 

말인즉슨 그저 억울하니까, 자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누구라도 원망할 대상이 필요하니까,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제 오해가 풀렸는데도 줄곧 세종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겠다는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유치하긴...;; 그리고 평생토록 세종 이도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갈고 살아왔으면서, 막상 세종이 소이를 자기와 함께 보내 준다고 하니 그 복수심을 단박에 꺾고, 금세 소이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헤벌쭉 좋아하는 그 표정하고는, 이건 뭐... 완전히 어린애군요..;; 

하지만 세종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막무가내로 떼쓰는 세 살배기 어린애 강채윤을 기꺼이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가 오는 길을 비워 주거라..." 시퍼런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강채윤을 막지 말고, 그가 궁궐 문을 들어서서 자신이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지나쳐야 할 모든 길목을 텅텅 비워 두라고, 세종은 내금위장 무휼(조진웅)에게 명령합니다. 언젠가 소이 앞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기다리며, 오직 인내하고 설득하겠노라" 했던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위험한 순간이지만, 오히려 세종의 마음은 설레고 있었습니다. 반항하며 집 떠났던 아들이 돌아오는 날, 어떻게든 그 녀석을 어르고 달래고 설득해서 다시 품에 안아 볼 생각으로 설레는 아버지처럼, 세종은 그렇게 똘복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 살배기 강채윤은 과연 떼쓰기를 멈추고, 아버지 세종의 품에 안길 수 있을까요? ...... 한글의 중성(모음)을 만들면서, 세종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중얼거리던 그 한 마디를 인용하며 오늘의 리뷰를 끝마칠까 합니다. "천지신명이시여, 백성을 굽어 살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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