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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정기준이 세종의 적수가 못되는 이유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뿌리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정기준이 세종의 적수가 못되는 이유

빛무리~ 2011. 11. 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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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베일에 싸였던 밀본의 수장, 본원 정기준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추측 속에서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던 반촌의 백정 가리온(윤제문)이 바로 그였습니다. 오히려 너무 강력히 추측되는 인물이므로 뻔한 전개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를 후보에세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별다른 반전은 없었습니다.

아무튼 정기준은 현재까지 세종(한석규)과 강채윤(장혁)을 완벽히 속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가리온의 정체를 꿈에도 모르는 세종은 그를 소중한 인재로 아끼며 자신의 사업에 동참시키려는 중이고, 강채윤은 천민의 설움을 겪는 그를 통해 죽은 아비 석삼의 모습을 발견하며 지극한 연민을 품게 되었습니다. 적들로부터 경계심이나 악의가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믿음과 호의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정기준은 진정한 능력자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현전 학사 남사철(이승형)의 자작극으로 가리온이 누명을 쓰고 위험에 처했을 때, 사실은 윤평(이수혁)의 도움을 받아 피신할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체포되어 의금부로 들어갔지요. 그 이유는 아마도 세종으로부터 더욱 확고한 신임을 얻고자 한 것일 테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해당 사건의 수사를 담당한 겸사복 강채윤이 가리온의 무죄를 추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세종은, 궁녀 소이(신세경)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그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국가의 중대사가 걸린 문제이므로 드러내 놓고 증언할 수는 없으나, 가리온은 무죄가 확실하니 그를 꼭 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국가의 대사보다 백정 가리온의 억울한 목숨이 더 중요했던 강채윤은, 굳이 화낼 일이 아님에도 소이가 전달하는 어명에 파르르 떨며 반발합니다. 국가의 대사인지 그 지랄인지에 이용하려는 것일 뿐, 가리온의 천한 목숨을 구하려는 것이 궁극의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감사해야 하는 겁니까? 그냥 죽이라 하지 않으시고, 구하라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소이는 당황하지 않고, 가장 현명한 답변으로 강채윤을 설득했습니다. "전하의 대사는 전하의 것만이 아니라 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저와 가리온의 목숨, 그리고 대의가 겸사복께 달렸습니다. 제발 구해 주십시오!" 궁녀의 신분으로 자기 앞에 엎드려 간청하는 소이의 진심을 보며, 강채윤의 눈에서도 차츰 독기가 빠져나가더군요.

하지만 수사는 좀처럼 진전이 없었고, 속으로 남사철을 의심하고 있던 세종은 강채윤을 찾아가 "너는 공포를 읽을 수 있느냐?" 이 한 마디로 힌트를 줍니다. 그 장면에서 제작진은 한 편의 콩트와도 같은 코믹 요소를 첨가시켰더군요. 강채윤과 대화하는 와중에 호위무관 무휼(조진웅)이 자기의 몸에 바짝 붙어 서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종이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모습은 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아까는 어찌 그리 멀리 떨어져 있었느냐? 강채윤과 이야기를 할 때 보니까 다섯보는 떨어져 있더구나. 너는 그 자가 과인에게 품은 저의를 모르느냐? 앞으로는 각별히 좀 신경을 써야 되느니라... 보면 아주 은근히 신경을 안 써...(쳇, 흥!) 삼보 이내에 있어야 되느니라!"

이 외에도 '뿌리깊은 나무' 10회에서는 코믹 요소가 부쩍 늘어난 것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강채윤이 사건을 해결하자 세종은 무휼에게 "강채윤 그 자가 제대로 알아듣고 일처리를 했으니 무휼 너보다 낫구나. 너는 못 알아듣지 않았었느냐?" 하면서 놀려대는데, 무휼이 진중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소신, 알아들었사옵니다..;;" 하며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모습은 무슨 만담 콤비처럼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삼문(현우)과 박팽년(김기범)이 갓 만들어진 훈민정음에서 몇 가지의 헛점을 짚어내며,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니므로 평가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자, 숙제검사라도 받는 학생처럼 초조하게 평가를 기다리던 세종은 "흥, 냉정한 녀석들!" 하면서 살짝 삐쳐버리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거운 사극이므로 가끔씩 코믹 요소를 넣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으나, 제가 보기에는 좀 과하지 않았나 싶더군요. 진담과 농담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한석규의 연기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일단은 큰 무리 없이 넘어갔지만, 자칫하면 세종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가벼워지고 희화될 가능성마저 있어 보였습니다. 무휼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가 널을 뛰면서 만화처럼 되게 하지 않으려면, 코믹에 집착하지 말고 적정선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한편 강채윤에 의해 누명을 벗고 풀려난 가리온은 우의정 이신적(안석환)과 마주하게 됩니다. 본원 정기준이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자, 그의 안위를 염려한 도담댁(송옥숙)은 유사시 파옥을 해서라도 가리온을 구해야 한다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밀본 전체 계원에게 위원령을 전달했던 것입니다. 무려 24년만에 도착한 본원의 명령이 천한 백정 가리온을 구하라는 내용인 것을 보고 놀란 이신적이 가리온을 찾아왔습니다.

"네가 밀본의 하수인이냐?" 이신적 본인도 밀본의 계원이면서, 왜 가리온을 그토록 무섭게 다그쳤는지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이신적은 밀본을 배신할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야 왜 같은 밀본의 동지로 추정되는 가리온의 얼굴에 칼까지 들이대면서 위협했던 걸까요? ... 어쨌든 그러한 이신적 앞에서 드디어 정기준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비굴한 자세로 땅에 엎드려 벌벌 기던 가리온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서릿발처럼 호통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입신양명하여 조정의 중역에 있으라는 명은 잘 지켰는데, 24년만에 떨어진 본원의 명을 무시해버린 밀본의 계원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그 말에 이신적은 혼비백산하고 맙니다. 24년 전, 밀본의 3대 본원 자리에 오른 소년 정기준이 멀리 떠나면서 내렸던 명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돌아왔을 때, 그대는 조정의 중역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기준은 이어서 말했지요. "대은은 어시은(깊이 숨는 것은 시끄러운 세상 속에 있는 것)이니, 나는 그대의 가까운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넋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는 이신적을 향해 가리온은 추상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내 너에게서 가까이 있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다음 명을 기다리고 있거라, 이신적!"

같은 시간, 심종수(한상진) 역시 도담댁을 통해서 본원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신의 동의 없이 위원령을 발포한 것에 분노하는 심종수를 달래기 위해, 도담댁이 가리온의 정체를 밝혔던 것입니다. 본원을 구출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말이지요. 드디어 시퍼런 칼날을 뽑아들고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정기준은, 연못에서 건져낸 집현전 학사의 시신을 참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종의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거립니다. "이도...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세종은 기쁜 마음으로 가리온을 만나기 위해 반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가리온 그 자가 (의금부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나의 명을 끝까지 발설치 않고 견뎌냈다니, 참으로 그 의기가 놀랍지 않느냐? 앞으로는 그에게 내 일을 모두 맡겨도 되겠다!" 무휼은 시간이 너무 늦었노라고 만류했지만, 세종은 너무도 흐뭇한 나머지 지금 당장 가리온을 만나야겠다며 궁궐을 나선 참이었습니다. 더없이 환한 미소를 띠고 밤길을 걸어가는 세종의 얼굴은, 가리온 정기준의 표독스런 얼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10회에 이르도록 베일에 싸여 있던 인물인 만큼, 기대와 궁금증이 너무 커져 있었던 걸까요? 막상 정체가 드러나니 왠지 허무하기도 하고, 적잖이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장 실망한 이유는 정기준의 풍채에서 그 어떤 위엄이나 기품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에, 저는 가리온이 정기준은 아니기를 무의식중에 바랬던 것도 같습니다. 날카로운 언변으로 소년 이도를 몰아붙이던 소년 정기준에게서는 대쪽같은 선비의 자부심과 기품이 느껴졌었지요. 천하의 이도가 그 앞에서 기죽고 상처받을 만큼, 어린 시절의 정기준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가리온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세종이 밤낮 없는 노력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해시계 물시계 등의 각종 발명품을 만들고, 스스로 똥지게까지 지면서 농업의 발전을 추진한 것은 백성을 가엾이 여기는 진심 때문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편히 살도록 해주려면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세종의 하루하루는 더없이 짧고 고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세종이 백성을 위해 그토록 진한 땀방울을 흘리는 동안, 정기준은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요? 그의 손에는 언제나 칼이 쥐어져 있고, 온갖 짐승과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겠지요. 온통 핏발이 서고 살기등등한 가리온의 눈빛을, 어찌 세종의 기품있고 온화한 눈빛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천박해 보였습니다.

정기준이 그렇게 칼을 갈며 살아온 목적은 뭘까요? 태종 이방원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한 백부 정도전과 부친 정도광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니면, 왕권을 실추시키고 정도전이 꿈꾸던 신권(臣權) 천하를 만들겠다는 궁극적 목표를 위해서?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백성을 위한 길이라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원수인 태종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데 그 아들인 세종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은 그저 못난 짓에 지나지 않고, 신권 천하를 만들겠다는 것 역시 자기들의 이기적 욕심일 뿐입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왕권 천하든 신권 천하든 살기 힘든 거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악역이라도 조금은 멋있기를 바랬는데, 알고 보니 정기준은 별 매력도 없는 그냥 악역일 뿐이었습니다. 비굴하게 머리를 숙인 상태에서 흘낏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징그러운 교활함이 가득하더니, 본원의 정체를 드러내고 벼락같이 호령하는 눈빛에는 소름끼치는 살기가 가득하군요. 이번의 고육지책으로 가리온은 세종과 강채윤의 단단한 신임을 얻었으니 앞으로 세종의 계획에 더욱 깊이 동참하게 될 것이고,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세종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하나 둘씩 살해당할 것이고, 수사는 더욱 미궁에 빠지겠군요. 누구보다 사람을 아끼는 임금 세종은 그 과정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참으로 고단한 왕이십니다. 그냥 반포하셔도 될 일을 이중 삼중으로 확인하시고 검증받고... 하여... 전하를 믿사옵니다.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믿사옵니다. 강채윤, 그 자도 분명 그리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옵소서!" 성삼문과 박팽년에게 한글에 대한 평가를 요청하는 세종을, 소이는 멀찌감치서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물론 그녀의 믿음이 옳습니다. 세종은 온갖 역경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내 자신의 높은 뜻을 이룰 테니까요. 하지만 그 고난의 길에서 아픈 가시를 몇 개나마 뽑아내 주고 싶군요. 영리한 강채윤이 어서 빨리 세종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의 진심어린 조력자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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