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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남자' 김승유의 편지 - 세령에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공주의 남자

'공주의 남자' 김승유의 편지 - 세령에게

빛무리~ 2011. 9. 1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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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이러십니까?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은 분노와 증오 뿐입니다. 그대의 아버지 수양에 대한 분노만이 나를 숨쉬게 합니다. 풍랑이 일던 그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이유도 오직 수양을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의 온 몸은 수양을 향한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으니, 그 마음을 빼낸다 하면 나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어쩌라고 나에게 이러십니까?

나는 그대의 아버지를 증오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대를 미워하였습니다. 신분을 숨기고 경혜공주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날을 떠올릴 때마다... 처음 만나던 그 날의 당돌하고도 새침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대가 미웠습니다. 흐드러진 비단옷을 입고서는 얌전치 못하게 말을 타고 싶다면서 승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조르던, 그 철부지같은 웃음소리도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가슴을 치도록 미웠습니다.

궐에서 쫓겨난 궁녀인 척하고 승법사에 숨어 있던 모습도... 여리라는 가짜 이름을 내게 가르쳐 주던 모습도... 새파란 하늘에 붉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그네를 타던 모습도... 갑작스레 다가서는 내 입술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던 모습도... 가늘게 떨리던 길다란 속눈썹도... 그 모든 것을 떠올릴 때면 너무도 미워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대가 미운 것인지, 내가 미운 것인지, 그대를 죽이고 싶은 것인지, 내가 죽고 싶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구차한 목숨 부지하고 살아 돌아와서야 알았지요. 그대가 누구인지를 그제서야 알았지요. 그러니 어찌 용서하란 말입니까? 나를 속이고, 내 아버지와 형의 검붉은 피가 땅 속 깊이 스며들도록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속이고, 머나먼 바다에서조차 나의 꿈 속을 어지럽히며, 나로 하여금 원수의 딸을 그리워하게 만든... 그대를 내가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혼례식 날 그대를 납치했던 이유는, 그대를 사랑해서도 아니었고 변절한 친구 신면에 대한 질투심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피를 흩뿌리며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보아야 했던 나의 고통을, 그대의 아비 수양에게 그대로 갚아 주려던 것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의 그에게도 부정(父情)은 있을 터이니, 눈앞에서 딸자식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진심이었는데... 

그대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내가 못난 탓입니다. 원래 복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낸 것은 그대의 고통을 더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대가 누구의 손에 죽는 것인지, 그대와 그대의 아비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죽기 전에 생생히 깨닫게 해주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얼굴을 보는 순간 그대의 눈빛에 떠오른 광채가 나를 멈칫하게 했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생기없던 그 눈빛이 나를 보는 순간 되살아나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진정... 살아계셨군요!" 그대는 왜 그토록 기뻐했습니까? 나는 그대의 아비와 모든 가족을 죽이려고 돌아왔습니다. 그 첫번째 희생양으로 그대를 지목하고, 죽이기 위해서 납치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대의 원수이며 가장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있다고 눈에 광채까지 떠올리며 기뻐하는 그대는 누구입니까? 자기 몸을 던져 내게로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고 정신을 잃어 가면서도, 줄곧 나를 향한 애틋한 눈길을 거두지 못하던 그대는 누구입니까? 그대의 가녀린 뼈와 살이... 그대의 맑은 눈과 뜨거운 심장이... 진정 수양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입니까?

내 평생 수양의 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요? 하지만 내가 지키지 못했던 형수님과 아강이를 그대가 지켜 주었으니, 무릎 꿇고 머리 숙여 절을 올린다 해도 그 은혜는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와 형을 죽인 것은 그대의 아비였지만, 피바다 속에서 떨고 있던 연약한 생명들을 구해낸 사람은 그대였군요.

대체 날더러 어쩌라고 이러십니까? 미워하지도 못하면 어떻게 살라고... 증오하지도 못하면 어떻게 버티라고 이러십니까? 어떻게든 잊어 보리라 다짐했건만, 눈 멀고 귀 먹어도 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그대는 아비보다 더욱 잔인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그토록 당부했건만, 그대는 오늘도 내 눈앞에 나타나 이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군요. 

난 이제 그대의 아비를 죽이러 가야 하는데, 내 옷깃을 부여잡는 그대의 뜨거운 손길이 나를 미치게 합니다. 대체 어쩌라고 이러십니까? 내 그대를 죽여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죽어야 하겠습니까? 잔인한 사람아, 말을 해 보세요. 우리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죽음의 길 외에 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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