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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형제의 재회, 문근의 슬픔이 더욱 아릿한 이유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계백

'계백' 형제의 재회, 문근의 슬픔이 더욱 아릿한 이유

빛무리~ 2011. 9. 13.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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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아역들이 활약이 한창이던 드라마 초반, 문근(이민호)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찌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계백(이현우)과 의자왕자(노영학)가 저마다의 색다른 매력을 뽐내며 영웅의 어린 시절을 폼나게 연기하고 있을 때, 문근은 그저 못난 술집 종업원으로서 걸핏하면 술이나 약을 바꿔치기하며 손님들에게 어설픈 사기를 치다가 발각되어 경을 치기 일쑤였고, 동네 불량배들이라도 나타나면 대적 한 번 하지 못하고 엎드려 벌벌 떠는 겁쟁이였습니다.

독개(윤다훈) 일당이 외팔이 무진(차인표)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대뜸 그들에게 다가가 "우리 아버지를 왜 찾는데요?" 라고 물었던 녀석도 바로 문근이었습니다. 그에게도 뇌가 있다면, 저 험악하게 생긴 놈들이 자기 아버지를 왜 찾는 걸까 잠시라도 고민해 보아야 마땅하련만, 문근이라는 멍청한 녀석에게는 그 정도의 신중함도 없었지요. 결국 집안에 들이닥친 위제단의 졸개들에 의해 무진의 가족 3명은 모두 인질로 붙잡히고 맙니다.

드디어 사택황후(오연수)를 납치하고 있는 무진의 위치가 발각되었을 때, 위제단은 황후를 놓아주지 않으면 가족을 죽이겠다고 무진을 협박하기 시작하는데, 그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이 하필이면 계백이었습니다. 막내아들을 놓아 보내더라도 마누라와 큰아들만 붙잡고 있으면 무진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결정적인 패착이었습니다. 무진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 문근과 명목상 아내일 뿐인 을녀(김혜선)에게 별다른 사랑을 느끼고 있지 않았거든요. 심지어 을녀가 자기 때문에 죽은 후에조차, 그녀를 아내가 아니라 은인으로만 대해 왔던 세월이 그저 미안할 뿐이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무진이 가슴으로 끔찍이 아끼는 유일한 가족은 친아들 계백 뿐이었지요. 만약 위제단이 계백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했다면 혹시 굴복했을지도 모르지만, 무진에게 있어 을녀와 문근의 존재는 사택황후를 소득 없이 놓아줄 만큼의 소중한 이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을녀는 위제단의 칼날에 피를 흩뿌리며 숨을 거두었고, 그녀의 친아들 문근은 어머니의 시체조차 거두지 못한 채 어디론가 황망히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못난이 소년 문근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고, 찌질이 소년 문근도 어른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어렸을 때와는 몰라볼 만큼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문근은 별로 멋진 사내가 아닙니다. 두 눈에는 독기만 가득 품은 복수의 화신이며, 돈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이며, 단숨에 수십명을 살해하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냉혈한이며, 저잣거리를 주름잡는 조직폭력배 두목일 뿐입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배워 왔는지 무술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데, 그렇게 나쁜 놈이라면 차라리 무능한 편이 훨씬 나은 법이죠. 어울리지 않게 날카로운 그의 칼솜씨마저도 서글플 뿐입니다.

한편 조정에서는 최측근이던 내신좌평의 배신으로 사택적덕은 그간의 모든 비리가 밝혀질 위기에 처하고, 사택황후는 그 충격 때문인지 원인 모를 병을 얻어 쓰러집니다. 사택가문을 소탕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의자(조재현)와 계백(이서진)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다가온 셈이죠. 계백은 가장 먼저 위제단을 소탕하기 위해 신라에서 돌아온 생구들을 이끌고 위제단의 본거지를 습격합니다.

은고(송지효)의 계책에 따라 맹렬한 독연기로 먼저 공격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위제단의 쟁쟁한 고수들은 삽시간에 중독되어 휘청거리며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계백과 생구들의 칼날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습니다. 결국 위제단의 막내 북조(박유환)는 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군요. (이 드라마 속의 유일한 꽃미남이었는데 이토록 명이 짧다니... 오호, 통재라..;;)

바로 그 때 문근이 자신의 패거리를 이끌고 쳐들어 옵니다. 그가 절치부심하고 고향에 돌아온 이유는 위제단을 소탕하여 어머니 을녀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마침 공교롭게도 교기 왕자(진태현)가 살인청부를 위해 찾아왔고, 문근은 교기를 통해 위제단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계백의 일당에 의해 위제단이 거의 전멸한 후라서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데, 그 와중에 위제단의 2인자 남조(조상기)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을녀에게 직접 칼을 휘둘러 살해한 자가 바로 외눈박이 남조였거든요.

원수가 눈앞에 나타나자 눈이 뒤집힌 문근은 미친듯 그에게 달려드는데, 문근의 출중한 무술에 남조가 밀리면서 목숨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러나 귀운(안길강)이 번개같이 나타나 남조를 돕는 바람에 삽시간에 전세가 역전되고 문근이 위기에 처하는데, 이번에는 계백이 달려와서 그를 구합니다. 특별히 문근을 구하려던 것은 아니고, 위제단의 우두머리인 귀운을 처치하기 위해 달려온 거였지만요.

어쩌다 보니 계백과 문근 형제가 한편이 되어 귀운을 나란히 공격하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택황후의 오른팔답게 귀운의 실력은 역시 대단하군요. 절세고수 두 명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약간 우세를 점하더니, 기어이 남조와 함께 몸을 빼내어 도망치는데 성공합니다. 그래도 일단은 계백의 목적대로 위제단을 섬멸시키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어요.

"뉘신지 모르지만 도와줘서 고맙소!" 어려서 헤어졌던 의붓형 문근을 못 알아보고 계백이 건네는 인삿말입니다. 문근 역시 계백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거칠게 쏘아붙입니다. "원래 내 먹잇감이었는데, 재수없게... 네놈들은 뭐냐?" 자기 손으로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고 십여년 동안 이를 박박 갈았는데 남의 손에 빼앗기고 말았으니 그 성질에 화가 날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속을 모르는 계백은 심히 무례한 어조에 발끈해서 문근의 칼을 쨍하니 쳐내고... 세월의 강을 건너 다시 만난 형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입니다.

그런데 저는 왜 계백보다도, 의자왕보다도, 문근의 슬픔이 훨씬 더 진하게 느껴져 오는 걸까요? 문근에게 훨씬 더 몰입이 잘 되는 이유는 뭘까요? 이 세 남자는 모두 어렸을 때 어머니를 비참하게 잃었던 가여운 사내들입니다. 그런데 선화황후(신은정)는 무왕으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고, 계백의 생모였던 명주(정소영) 역시 무진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었지요. 비록 국가 수뇌부의 추악한 권력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긴 했어도, 그녀들은 최소한 남편으로부터는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행복한 아내였습니다.

하지만 을녀는 어땠나요? 무진의 허울뿐인 아내가 되어 한 방울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그녀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일방적으로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남편의 전처가 남긴 핏덩이 자식을 기꺼이 받아 안고, 자기 친아들과 똑같이 사랑하며 성년이 되도록 살뜰히 키워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보답은 어이없는 죽음뿐이었습니다.

무진 장군은 나라의 충신이었지만, 을녀에게는 더없이 나쁜 남자였죠. 무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을녀를 속속들이 이용했을 뿐입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집에 둥지를 틀어 몸을 숨겼고, 그녀의 손에 어린 아들을 맡겨 키우게 했습니다. 그 와중에 밥벌이도 하지 않고 허구헌날 술이나 마시고 다녔으며, 결국은 자기 때문에 을녀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구하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문근은 이 세 남자 중에서도 제일 힘없고 불쌍한 여인을 어머니로 두었습니다. 어쩌면 문근에게 있어 진정한 원수는... 위제단이 아니라 의붓아버지였던 무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무진의 아들 계백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근은 명백한 피해자라는 말이죠. 하지만 극 중에서는 어디까지나 계백이 영웅이고, 문근은 오갈 데 없는 악역입니다. 그가 더없이 못되고 냉혈한 살인마로 나올수록... 저는 그게 너무나 슬픕니다. 

높으신 어른들의 권력 싸움 따위는 알지도 못했던 가난한 여인...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무진에게 반해 그에게 마음을 주고 모든 것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피를 흩뿌리며 비명횡사할 일도 없었을 여인... 또 그런 일에 휘말리지만 않았더라면 평생 어머니와 더불어 소박한 민초로 살아갔을 멍청한 소년... 저는 이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이 너무나 가엾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주인공한테 집중해야 하는데... 임금님의 설움보다... 장군의 설움보다... 이 못난 부랑자 문근의 설움이 제 가슴에는 백배 천배 아리게 맺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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